본문 바로가기

텍스트

멋진 삶에 멋진 자서전, <자서전 비슷한 것>

구로사와 아키라의 자서전 제목을 듣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자서전 비슷한 것>. 영문판 제목도 <Something like an autography>이다. 박찬욱 감독은 한국판 추천사에 '추천사 비슷한 것'이란 제목을 달았다. 


책은 구로사와가 만 69세쯤인 1978년에 썼다. 구로사와는 이 책을 쓰고서도 20년을 더 살았고, 다섯 편의 장편 영화를 더 만들었다. 구로사와는 그동안 자서전을 쓰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지만 "글로 써서 남길 정도로 내 이야기가 재미있다고는 생각하기 않았기 때문"에 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가 마음을 바꾼 계기는 두 명의 존경하는 감독 때문이었다. 한 명은 장 르누아르. 그는 르누아르의 자서전을 읽고 자극을 받아 그와 비슷한 것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다른 한 명은 존 포드. 구로사와는 존 포드의 자서전이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한다. 


자서전을 집필한 배경을 소박하게 밝히고 있지만, 글은 매우 잘 쓰여진데다가 재미있다. 문장이 탄탄하다거나 묘사가 현란하다거나 구성이 튼튼하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다. 구로사와는 자서전에서 군인 아버지의 나약한 아들로 태어난 시절부터 '세계의 구로사와'라고 불린 계기가 된 <라쇼몽>(1950)을 제작했을 때까지의 삶을 담았다. 나고 자라 전쟁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감독이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과장이 없으면서도 재미있게 서술돼있다. 한 마디로 그의 '삶'이 흥미진진했기에 그것을 간략히 전하는 것만으로도 글이 흥미진진해진 셈이다. 애초에 <주간 요미우리>에 연재했던 것을 훗날 단행본으로 묶었다고 하는데, 추정해보자면 연재 당시 일본의 노련한 편집자가 글을 매끈하게 다듬지 않았나 싶다. 



<라쇼몽>의 미후네 도시로. (한국 네티즌에게는 '노홍철 닮은꼴'로 더 유명하지만) <라쇼몽>이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을 때, 구로사와는 출품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일본에 머물며 다음 작품 준비가 잘 되지 않아 낚시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구로사와는 훗날 자신과 함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던 소설가 우에쿠사 게이노스케와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고, 권위적인 선생 때문에 학교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시기를 거쳤고, 관동대지진 당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형과 함께 산더미같이 쌓인 시체더미들을 구경다니기도 했고,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중학교에 파견된 대위와 대결을 벌였다. 일찌감치 예술에 눈을 뜬 형을 따라 온갖 고전문학, 영화들을 독파했다. 구로사와는 10살~20살 사이(1919~1929) 본 영화들의 목록을 공개했는데 에른스트 루비치, 그리피스, 찰리 채플린, 라울 월쉬, 프리츠 랑, 존 포드,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무르나우, 에이젠슈타인 등 <세계영화사> 같은 책에서 분명히 언급할 무성영화 시대 거장들의 목록을 모조리 섭렵했다. 구로사와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한 작품만 보았다"고 돌이킨다. 


화가를 꿈꾸었던 구로사와는 한때 프롤레타리아 미술연구소를 통해 사회주의 지하조직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심한 감기에 걸려 앓아누운 동안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접선책과 연결이 끊겨 운동을 그만두었다. 그는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을 핑계로 괴로운 불법 활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도망쳤다. 좌익 운동의 열이 식은 게 아니라, 애초 내 열의가 대단치 않았다"고 인정한다. 


무성영화 변사로 활동했던 형이 자살한 후, 구로사와는 우연 혹은 필연처럼 영화사에 입사한다. 영화를 많이 보긴 했지만 그것을 업으로 삼고 싶은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구로사와였지만, 신문에서 'PCL 영화촬영소(훗날의 도호 영화사) 조감독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덜컥 지원해 붙어버렸다. 그는 야마모토 가지로 감독의 조감독이 된 뒤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 얼굴에 고갯마루의 바람이 불어왔다. 고갯마루의 바람이란 길고 험한 산길을 오를 때 고갯마루에 가까워지면 산 저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말한다. 그 바람이 얼굴에 닿으면 고갯마루가 가깝다는 뜻이다. 그리고 곧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탁 트인 전망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카메라 옆의 감독 의자에 앉아 있는 야마 상 뒤에 서서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감회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야마 상이 지금 하고 있는 일, 그것이야말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다. 

나는 겨우 고갯마루 위에 다다랐던 것이다. 그 고개 너머로 탁 트인 전망과 일직선으로 뻗은 길이 보였다.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


책에는 창작자들이라면 새겨들을만한 노하우, 마음가짐도 많이 들어있다. 편집실에서는 촬영분이 잘려나가기 일쑤였는데, 고생해서 찍은 사람의 입장에선 마음 아픈 일이다. 하지만 구로사와는 말한다. 


감독이 고생을 하건 조감독이 고생을 하건, 아니면 카메라맨이나 조명 담당이 고생을 하건, 그런 일은 관객이 알 바 아니다. 중요한 건 군더더기 없이 충실한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찍을 때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찍는다. 하지만 찍고 나서 보면 찍을 필요가 없었던 것도 많다. 필요 없는 건 필요 없는 거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가 고생한 양에 비례해서 가치판단을 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영화를 편집할 때는 절대 금물이다. 


당시의 검열관을 혹독하게 비판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튼 검열관이라는 도베르만은 당대의 권력에 잘도 길들여져 있었다. 권력에 길들여진 하급 관리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데뷔작 <스가타 산시로>의 성공에 고무된 영화사가 속편을 추진한데 대해서는 이런 감상을 전한다. 


그들은 과거에 히트한 작품만 영원히 쫓아다닌다. 새로운 꿈을 꾸려고 하지 않고 옛꿈만을 바란다. 리메이크한 것은 절대로 원작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런 오류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거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리메이크하는 사람은 원작에 신경을 쓰면서 만든다. 이는 마치 먹다 남은 음식을 재료로 해서 이상한 요리를 만드는 셈이다. 그런 것을 먹어야하는 관객들이 무슨 죄인가. 


멋진 삶을 살았으나 멋진 자서전을 남기지 못한 이는 있을 것이다. 비루한 삶을 살았으나 멋진 자서전을 남긴 이는 없을 것이다. 







 
 1991년 5월 <8월의 광시곡>으로 칸국제영화제를 찾은 구로사와 아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