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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비스마르크인가?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내 인식은 '점진론자' '온건주의자'였고, 안중근의 의거로 인해 일본의 조선 병탄이 오히려 가속화된 측면이 있다는 견해도 설득력 있게 여기는 정도였으나. 이 책은 그같은 나의 얄팍한 상식을 여지 없이 무너뜨린다. 군인이 아닌 외교관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겉으론 대의명분과 온건한 방법론을 내걸었지만, 그 역시 제국주의의 첨병일 뿐이었다. (물론 이토 히로부미가 가진 정치인, 외교관으로서의 수완, 경륜까지 폄훼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울러 책을 읽고 나니, 한반도의 근대 정치가들 중 이토 히로부미 정도로 폭넓은 국제적 시야를 가진 이들이 있을지 궁금했다. 별로 없을 것 같다. 다들 뜻은 클지언정, 그 뜻을 실행할 능력은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설사 그런 능력을 갖췄다해도, 시대와 지역의 제약을 넘어서는 인물은 없었을 것 같다.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한상일 지음/까치/460쪽/3만원



한국인에게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안중근 의사의 총에 목숨을 잃은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한국 바깥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본국 일본에서의 명성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국제 사회에서도 이토는 중국의 리훙장과 함께 가장 유명한 동양 정치인이었다. 일각에서는 이토를 ‘동양의 비스마르크’라고까지 불렀다.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이토 히로부미의 성장과 출세 과정이다. 이토는 아버지의 원래 성(姓)도 제대로 알려져있지 않을 정도로 빈한한 시골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토의 아버지가 도시로 나와 사무라이의 머슴살이를 하다가 그의 양자로 간택되자, 이토 역시 사무라이의 성을 받았다. 당시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수명을 다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체제가 움트고 있었다. 이토는 개항의 물결 속에서 상투를 자르고 영국 견학의 길에 올랐다. 1868년 메이지 정부의 초급 관리가 된 이토는 이후 40여년간 국가 경영에 참여했다.


메이지 정부 초기, 대륙 진출을 위해서는 한반도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두고 당대의 정치가들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졌다. 이는 권력투쟁으로 이어졌고, 몇몇 주요 정치인들은 암살 혹은 사형으로 세상을 떴다. 권력 공백기를 틈타 이토는 순조롭게 권력의 핵심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헌법 제정에 착수하고, 초대 총리대신이 됐고, 청나라와의 전쟁을 치렀다. 이토는 특히 전쟁을 치르는데 있어 군사력을 넘어 외교력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욱일(旭日)의 깃발이 베이징 성문에 휘날릴 날”을 기대하던 군부와 달리, 이토는 청의 붕괴가 일본에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책의 후반부는 이토와 한반도의 관계를 서술한다. 이토의 명성은 당시 한반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1904년 3월 이토는 천황의 특사 자격으로 황실을 찾아 고종을 세 차례 알현했다. 이토는 동양의 정세, 일본 근대화, 한국의 시정개혁 등에 대한 폭넓은 견해를 제시했고, 고종은 “경의 말 하나하나가 정곡을 찌르는 것으로써 깨달은 바가 크오”라는 말을 남겼다. 힘없고 폐쇄적이던 대한제국의 군주 고종은 국제정세에 밝은 이토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고종이 이토 방한의 진짜 목적, 즉 한국을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을 차지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가운데). 식민지 친화적 제스쳐. 


일본은 이토를 앞세워 한반도 진출의 야욕을 차츰 드러냈다. 같은해 10월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고 나아가 병탄시키겠다는 내용의 국시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고종이 “일본의 진의를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상황”을 언급하자, 이토는 “한국이 어떻게 해서 오늘의 생존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는지, 또한 한국의 독립은 누구 덕택이었는지 이 한 가지만을 묻겠습니다”라고 되받았다. 이토는 일본이 청,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동아시아의 안전을 지켜왔다고 강변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이 희생을 치러왔다는 논리였다.


메이지 국가건설의 최대 공로자인 이토는 이듬해 대한제국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자국에서 이룰 것을 다 이룬 65세의 정치인·외교관에게 한국 통감은 작은 자리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한’은 메이지 정치인들에게 무의식적 염원이자 미완의 과제였고, 이토는 이를 위해 인생의 마지막 나날들을 투자하기로 했다.


이토는 신중하고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한국인의 ‘열복’ 위에서 일본 지배의 정당성과 권위를 확보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국의 문명화’를 한반도 지배의 목표로 내걸었다. 명목상으로 황제의 권위를 인정했고, 선정(善政)의 이미지를 유지하는데 신경 썼다. 한국의 병탄에도 반대했다.


이같은 사실을 들어 일각에서는 이토의 죽음이 일본의 한국 병합을 가속화했고, 무단통치를 불러왔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국민대 정치학과 명예교수인 저자는 이토가 “소걸음처럼 천천히 목적지를 향해 걷는” 점진주의자였을 뿐, 최종 목적은 어디까지나 병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능란한 외교관이었던 이토는 한국인의 저항과 통치비용을 최소화하면서 한국을 ‘일본화’하려 했다. 그는 의병 투쟁 등 한국인의 격렬한 저항을 들어 통감 사임 의사를 밝힌 뒤, 후임자에게 병탄의 과제를 남겼다. 쉽게 말해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에서는 암살이라는 방식으로 이토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인생의 황혼길에 병상이 아니라 이국에서, 그것도 일본의 숙원사업인 정한의 과정에 죽었다는데 대한 낭만적 감상이었다.


저자는 이토의 지배 방식이 “문명의 탈을 쓴 근대적 법과 제도, 군사력, 그리고 정보와 사법기관, 푸코의 표현을 빌리면 ‘기기(apparatus)’와 ‘권력의 그물망’에 의존한 비문명적이고 억압적인 지배”였다고 결론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