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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고 급진적인 처방. 이오덕의 <삶과 믿음의 교실>

이날(1월 14일) 신문의 북섹션을 살펴봤는데, 이 책을 짧게라도 다룬 곳은 찾지 못했다. <삶과 믿음의 교실>은 출판 담당을 맡은 뒤 쓴 본격적인 첫 리뷰 서적이다. 




▲삶과 믿음의 교실

이오덕 | 고인돌 | 469쪽 | 1만5000원

10대는 아프다, 학부모는 괴롭다, 교사는 힘들다고 한다. 모두가 동의하는 건 ‘문제가 있다’는 판단뿐, 해법은 수백가지다. 우리 교육을 어찌해야 하나. 

가장 단순한 대답이 매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때가 있다. 이오덕 선생(1925~2003)은 소박하고 명쾌한, 그래서 급진적인 교육사상가였다. <삶과 믿음의 교실>은 1978년 처음 나온 선생의 교육수상집이다. 1990년대 초반 절판돼 구하기 힘들었으나, 이번에 새로 편집돼 나왔다. 선생은 자신이 정립한 ‘우리말 바로쓰기 원칙’에 입각해 이 책의 교정을 보다가 세상을 떴다. 책에는 선생의 육필 교정 원고가 일부 실려 있다. 원문에 손을 댄 빨간 펜 자국이 빼곡하다. 교정이 완성됐으면 절반은 새로 쓴 것이나 마찬가지일 뻔했다. 

지금 교육이 엉망이라고 하지만, 선생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선생은 당대 교육을 ‘천박한 물질주의와 황금의 세력’이 주도한 ‘살인교육’이라고 말한다. 당시 한 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다. 저학년 교실에 도둑이 들었다. 교실마다 돌아다닌 도둑은 별 소득이 없자 칠판에 적힌 아침자습용 문제를 지우고 여자 나체화를 그려놓았다. 이튿날, 등교한 아이들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칠판의 그림을 베껴 그렸다. 칠판 한쪽에 지우다만 글자의 모양까지 베꼈다. 아이들은 칠판에 적힌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교사의 지시대로 베끼는 ‘기계인간’이 됐기 때문이다. 선생은 “삶에서 떨어져 있고 일과 놀이가 빠져있는 학습”, “사람을 병신되게 하는 빈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을 한탄한다. 남의 실수를 기다려 이득을 보는가 하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깔아뭉갠다. 교육당국은 이를 부추긴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사랑’이다. “교육이 사랑으로 이뤄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오늘날의 교육에서 가장 결핍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 사랑”이라고 선생은 진단한다. 선생의 종고모는 돼지를 잘 길렀다. 비결을 묻자 돼지우리 앞에 선 종고모가 말했다. “무슨 짐승이든지 귀여워 해주면 된다.…돈이란 건 잊어버리고 그저 귀여워 쓰다듬어 주고, 먹고 자는 것 돌봐 주고 하면 저절로 쑥쑥 자라나거든.” 

돼지도 사랑을 먹고 자랄진대, 사람은 오죽할까. 사랑의 목적은 사랑일 뿐이다.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기 위해 사랑하지 않는다. “타산적인 심리의 유발은 바로 그 타산으로 하여 교육에 파탄을 가져 온다.” 

사랑은 믿음에서 자란다. “아이들의 착함과 참됨과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데서 비로소 교육이 시작”된다. 아이들을 믿지 못하는 건 인간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선생은 “아이를 학대하는 종족은 망한다”고 단언한다. 4500년 전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인류 최초의 도시 문명을 만들었던 수메르인들의 교육 모습이 묘사된 점토판이 있다. 글을 쓴 아이는 수업 시간에 잡담을 하고 한눈을 팔고 글씨가 서툴다고 선생에게 맞았다고 토로한다. 오늘의 교육은 그때보다 더 퇴화했다. 4500년 전 아이는 적어도 솔직했다는 점에서 오늘날보다 나은 면이 있다. 

선생은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눈다. 어릴수록 선이고 나이들수록 악이다. 우리 모두 갓난아기 때는 순결한 인간이었으나, 어른의 세상에 물들면서 악한 인간이 됐다. 교육은 악에 물든 사회 속으로 나갈 아이들에게 악을 미워하고 없애라고 가르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물론 물리적 나이가 많다고 늙은 건 아니다. “그래도 지구는 움직인다”고 말한 과학자, 인류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리스도는 순수한 동심을 가진 어른이었다. 세상을 추종해 제 생각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참되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키는 것이 어린이 마음이다. 그래서 어른도 어린이일 수 있다. 

<삶과 믿음의 교실>은 이오덕 선생의 교육철학서이자 문학이론서다. 그에게 일과 놀이, 삶과 예술은 하나다. 삶에 뿌리내리지 않은 예술만큼 헛된 것도 없다. 선생은 “일제 때 부모들이 보내 준 학비로 일본에 유학을 갔다 와서 구름이여 달이여 하고 글줄이나 쓴 것으로 민족의 핏줄인 우리말글을 지켰노라 이제 와서 자랑하는 문인들”을 비판하고, “봄에는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종달새가 하늘 높이 울고” 어쩌고 하는 모방의 글쓰기를 경멸한다. “동서고금에서 문학작품을 쓴다는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홀로 몽상에 젖거나 영감이란 것에 사로잡혀 쓴 어떠한 작품도 그것이 오랜 생명을 누려본 일이 없다.…영원한 생명이 있다면 그때 그 자리에서 문학자로서나 인간으로서 최대한의 양심과 정직성을 발휘해서 쓴 작품만이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보고 들은 것을 정직하게 털어낸 글은 자연스럽게 보편성을 획득한다. 설령 그것이 개인의 일상에서 취한 조각이라 하더라도, 작가의 생각이 얼마나 깊은지에 따라 개인의 한계를 넘어선다. 

어린이를 위한 글짓기 교육도 마찬가지다. 글짓기 지도는 시인이나 소설가를 양성하기 위한 것도, 교육 실적을 올리기 위한 것도 아니다. 시를 짓는다는 것, 문학을 한다는 것은 인간적 성장에 필요한 교육이다. 시를 쓰면서 아이들은 사물을 정직하고 깊이 있게 본다. 기계가 되지 않고 창의적인 인간이 된다. 이오덕 선생이 높게 평가하는 아동문학가는 마해송, 이원수, 이주홍, 권정생 작가 등이다. 아동문학은 “비뚤어진 어린이들의 삶과 의식을 올바르게 깨우쳐 주는 문학”이어야 한다. 선생은 “만일 열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아니 백 중 하나라도 부당하게 짓밟히는 아이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할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는 아이가 되도록 한다면, 그런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위대한 문학이 되겠는가”라고 묻는다. 

그런 교육이나 문학이 쉽게 이루어질 리 없다. 필요한 건 희생, 그리고 희생을 견디는 의지다. ‘안정된 직장인’으로서의 교사, 억대 연봉의 스타 사교육 강사를 부러워하는 이라면, “교육자가 장사꾼과 다른 점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희생을 즐겨 견디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라는 선생의 단언에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선생은 “역시 희생되는 사람은 있어야 하고 교육자가 희생되어야 한다. 교육자의 희생 없이 나라가 설 수 없고 우리의 앞날에 희망이 없다”고 덧붙인다. 

물론 그건 선생의 믿음이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오늘날 자주 조롱당한다. 또 다른 이오덕이 나타난다면, 그는 분명 바보 취급을 받을 거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동화 속 예수 역시 늙은 병사, 추위에 떠는 엄마와 아기, 사과 장수 할머니로 나타났다. 이오덕 선생은 ‘바보’지만, 이는 러시아 소설에 자주 나오는 ‘위대한 바보’다. 선생은 “오늘날의 한국은 진정 십자가를 지고 가시밭을 걸어가야 할 많은 목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황금의 우상을 숭배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고난과 박해를 당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황금을 멀리해 가난한 이들은 또한 부유하다. “그 정신 내부에 무한한 자유와 희열의 세계를 자기의 영토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이 처음 나온 지 34년이 흘렀다. 어떤 정신은 시대를 초월하지만, 어떤 태도는 시대에 구속된다.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온당하지만, 오늘 같은 다문화 시대에 ‘민족혼’을 강조하는 건 오해를 부를 수도 있다. ‘거짓스러운 말재주와 글 장난’을 훌륭한 문학으로 여길 수 없다는 생각은 지당하지만, 언어를 혁신하려는 문인들의 노력 역시 유용하다는 의견도 많다. 

선생은 “생명을 가진 아이들이 떠든다는 것은 골목에서나 운동장에서나 마찬가지로 교실에서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한다. 책을 읽는데도 이런 생각을 적용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소란하고 무질서해서, 자유롭고 비판적인 독서. 이오덕 선생도 그런 책읽기를 원할 것 같다.

 생전의 이오덕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