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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필름, LP, 아날로그의 끝자락

로모 카메라로 찍은 정동길/ by 잘 아는 분



필름 회사 이스트만 코닥이 파산을 신청했다고 한다. 디지털 카메라를 처음 만든 회사가 코닥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은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는 경영'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경제경영서에 나온다. 

나는 지금 향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무려 18년전인 1994년 무렵. 한국을 포함해 전세계에서 LP는 멸종되고 있었다. 가요 음반이 100만장, 200만장씩 팔리는 시절이었지만, 대세는 CD였다. 갓 20대에 접어든 내가 그리 이르게 향수를 느낄 줄이야. 

LP 구경은 내 고교시절을 즐겁게해준 몇 안되는 놀이였다. 어쩌다 시간이 있는 주말이면 나는 다운타운의 대형 레코드 가게로 향했다. 팝, 록, 프로그레시브, 재즈 등으로 분류된 장르의 선반을 돌아다니며 외국 음반들의 화려한 아트워크를 구경했다. 어쩌다 과감히 집어들고 값을 치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구경만으로 족했다. 당시 재발매된 레드 제플린의 모든 정규 음반은, 18년간 여러 번의 이주 과정에서도 버리지 않았다. 조동진, 어떤날, 들국화, 핑크 플로이드, 딥 퍼플도 마찬가지다. 

지금 나는 턴테이블을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아마 아기가 태어난 이후론 한 번도 켜보지 않았을 것이다. CD를 듣는 것조차 작은 사치인 마당에, 커다랗고 불편한 LP를 들을 여유는 없다. 아마 턴테이블 바늘도 성치 않을 것이다. 그래도 몇 장 남지 않은 LP를 버릴 수는 없다. 아무리 먼지가 더깨로 쌓여간다 해도. 난 물건을 쌓아두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향수의 주요한 조각들을 내버릴 정도로 무정한 사람도 아니다. 

소니였던가, LP 창고를 정리한다는 소리를 듣고 매장을 찾아간 적이 있다. 대여섯 장의 음반을 사서 돌아왔다. 그들은 재킷 한 구석에 동그란 구멍을 뚫었다. 아마 다시 판매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그랬을 거다. 그렇게 LP는 '창고 정리'와 함께 사라졌다. 

코닥의 파산과 함께 '필름 사재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내게도 필름 카메라가 있다. 산 지 10년도 넘었다. 러시아 스파이들이 사용했기에 플래쉬를 달지 않았다는, 아마 마케팅을 위해 꾸며진 것으로 보이는 그런 소문이 붙은 로모 카메라다. 한때 그 카메라를 들고 많이도 찍어댔다. 한 롤을 찍어도 마음에 들게 나오는 건 몇 컷이 안되는 카메라였다. 카메라 회사는 그런 우연성이 로모의 장점이라고 홍보했다. 색감이 과장되게 화려하고, 주변이 검게 나오는 '터널 이펙트'도 로모의 특성이라고 이야기됐다. 그랬던가. 

로모로 찍은 학교 운동장/by 잘 아는 분 



그 카메라로 셀카도 찍고, 방도 찍고, 친구도 찍고, 지금 아내가 된 여자친구도 찍었다. 아내는 내가 그 카메라를 가진 것을 일종의 '쉬크함'의 상징처럼 여겼던 것 같다. 사진의 질이야 어찌됐든, 아무튼 쉬크한 사람으로 보여 여자친구를 사귀고 결혼까지 했으니 로모 카메라는 내게 와서 제 값을 했다. 

그런 나도 로모 카메라에 새 필름을 끼운 지 오래됐다. 그래도 LP를 안들은 것만큼 오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필름의 시대가 끝났다고 한다. 아마 스마트폰의 '푸딩 카메라' 앱으로 찍어낸 디지털 사진들이 로모의 느낌을 대신하겠지.  

그럼 상자를 뜯어 필름을 카메라 안에 넣고 한 컷씩 돌리는 느낌은? 전자음으로 '재현'된 '찰칵'이 아니라 진짜 '찰칵'하는 소리는? 미약한 빛이 필름에 내려앉는 것을 상상하는 기분은? 필름을 맡긴 뒤 이번엔 몇 컷이나 건졌을까 기다리던 때의 작은 흥분은? 

디지털 시대는 디지털의 향수와 추억을 쌓는다. '디지털은 매력없다'고 치부할 일은 아니다. 그래도 난 아날로그 시대의 끝자락을 살았다. 그건 내게 행운이다. 

로모로 찍은 한강/by 잘 아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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