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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사회의 첩보원, <007 스펙터>



**스포 일부 있음


로저 무어나 피어스 브로스넌의 007을 즐긴 적은 없다. 별로 세련될 것도 없는 내 90년대 감수성으로 봐도 그들의 007은 구시대적이었으니까. 브로스넌이 북한의 가상 악당을 대상으로 싸운 <007 어나더데이>는 그저 하나의 농담 같았다. 


새 007에 캐스팅된 다니엘 크레이그는 듣도 보도 못한 배우였다. 얼굴을 처음 봤을 때, 그 얼굴에 악당이면 악당이지 제임스 본드 역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도무지 생각하기 힘들었다. 


크레이그의 첫 007 시리즈 <카지노 로얄>(2006)은 첫 장면에서부터 제이슨 본 시리즈나 트리플 엑스 시리즈에 의해 놀림당할 대로 놀림당한 007의 전통을 품위있게 재창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선언은 실천됐다. 느끼하고 구닥다리 같은 007은 크레이그와 함께 기름기 없고 날렵하고 냉정하고 좀 더 현실적인 인간으로 거듭났다. 크레이그의 007은 헤픈 웃음을 짓거나 장광설을 늘어놓는 대신, 그냥 싸운다. 모든 행동이 목적지향적이어서 마치 기계같은 느낌마저 주지만, 낭만을 제거한 실용적인 007은 이전에 본 적 없었기에 이 시리즈는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짐작이지만 크레이그의 007이 없었다면 이 유서깊은 시리즈는 그냥 끝을 내야 했을 듯하다. 


어제 본 <스펙터>는 크레이그의 마지막 007 영화라는 소문이 있었다. 크레이그가 진작부터 제임스 본드 역을 그만두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한데다가, <스펙터>의 마지막 장면도 이제 크레이그를 험한 임무로부터 놓아주겠다는 제작진의 의도를 보인다. 하지만 크레이그의 마지막 007 작품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스펙터>는 아쉽다. 전작 <스카이폴>(2012)이 근사하게 보여준 기억, 전통,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희극적으로 보이게 한다. 


<스펙터>가 지시하는 현실이 있다면,현대 민주주의 사회, 정보 사회에서 첩보원 역할의 변화상이다. 절차적 투명성을 강조하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인 면허'를 가진 첩보원이 존재한다는 것은 온당한가. 드론, 감청기술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휴민트에 의존하는 첩보 방식이 유효한가. 제기할만한 질문이고, 제이슨 본보다는 오랜 역사를 가진 제임스 본드가 답해야할 질문이기도 하다. 



루이비통 화보 아님. 


이 질문에 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을 영화는, 그러나 제작진의 허튼 한 수 때문에 산으로 간다. 제작진은 <스카이폴>에서 재미를 본 제임스 본드의 정체성 탐구를 이어가기 위해 초기 007 영화에 나왔던 범죄 조직 스펙터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스펙터에게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게 한다. 하지만 제이슨 본 혹은 크레이그의 007 시리즈를 통해 좀 더 현실적인 적 혹은 악의 세력에 익숙해진 현대 관객에게 <카지노 로얄> <퀀텀 오브 솔러스> <스카이폴>에 나온 모든 악당이 속한 조직이라는 스펙터의 규모는 좀 황당하다. 떠나려는 크레이그에게 '최종 보스'를 이길 기회, 과거의 실수나 가책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주겠다는 제작진의 의도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앞선 세 편 사이에 서로의 연결고리가 희미했기에, 마지막인 <스펙터>에서 갑자기 이를 묶어낸다는 것은 무리한 시도였다. 


게다가 정신없는 액션과 예의 세계일주 추격전 때문에 넋놓고 보게 되긴 하지만, 본드 그리고 스펙터 보스인 한스 오버하우저의 행동 동기가 자연스럽지 않다. 오버하우저는 때로 폭력조직의 두목처럼, 때로 기업인처럼, 때로 종교지도자처럼 행동하는데 이러나 저러나 그 행동들이 너무나 허세스럽다. 적을 불러 자신의 시설과 계획을 매우 꼼꼼히 설명하는가 하면, 별로 치밀하게 설계한 것 같지도 않은 게임을 제안했다가 패배를 맛보기도 한다. 크리스토프 왈츠의 연기조차도 이 이상한 악당 캐릭터를 구제하진 못한다. 오버하우저의 이상한 캐릭터에 감염된 것일까. 본드 역시 왜 그렇게 행동하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다. 레아 세이두와 함께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화보 촬영을 시작하는가 하면(북아프리카 사막의 간이역에 선 두 남녀의 모습을 보라. 그대로 스틸을 오리면 명품 화보다.), 아무 대책 없이 악당의 초대에 응한다. 오버하우저가 본드를 괴롭힌 동기가 밝혀지는 대목에선 "정말 저게 다인가?"라는 질문이 머리 속에서 끊이지 않는다. 



무서운 척 하는 보스. 알고보면 애묘인. 


후반부에 한번은 더 나올줄 알았던(설령 시신으로라도!) 모니카 벨루치가 10분만에 소모된 채 사라지는 모습도 이상하다. 난 벨루치의 대단한 팬이 아닌데도 그렇다. 아무튼 <스펙터>는 크레이그의 마지막 007로서는 여러모로 아쉬운 영화가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크레이그가 한 번 더 나와야할 것 같지만, 이미 언론과 도박사들은 차기 007이 될 배우 후보군을 좁히고 있다. 안녕, 크레이그. 평화롭게 늙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