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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의 초상, <루시언 프로이드>




루시언 프로이드(1922~2011)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다. 현재 내 미감은 설치, 영상, 팝아트보다는 구상에 더 끌린다. 


리움에 갈 때마다 상설관에 있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 앞에 한참을 머물곤 한다. 반면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색면 분할은 스윽 스치고 지나가는 정도다. 베이컨은 "추상은 장식일 뿐"이라고 비아냥 거렸다고 한다. 내 주제에 베이컨처럼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아무튼 로스코, 폴록의 그림보다 베이컨, 프로이드의 그림에 끌리는 건 분명하다. 동시대 같은 공간에서 활동한 베이컨과 프로이드는 친구였고 서로의 초상을 몇 차례 그려주기도 했는데, 작은 오해와 다툼으로 인해 의절한 뒤 평생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조디 그레이그가 쓴 <루시언 프로이드>(다빈치)를 읽었다. 어린 시절부터 프로이드의 그림에 매료된 그레이그는 오랜 기다림과 우여곡절 끝에 프로이드의 마지막 생애 10여년간 그와 친분을 쌓을 기회를 얻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하면, 프로이드의 전기를 쓰려는 앞선 몇 차례의 시도는 모두 불발됐기 떄문이다. 프로이드는 합법, 혹은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자신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을 막았다. 심지어 어떤 프로이드의 자녀는 아버지의 전화번호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생활은 뭇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노년에 이르기까지 방종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그는 파파라치의 좋은 타겟이었다. 믈론 이 괴팍한 할아버지는 사생활에 개입하려는 자기보다 수십 살 어린 이들에게 주먹질을 하기 일쑤였다. 


프로이드는 어딜가나 눈에 띄는 사내였고, 때론 일부러 눈에 띄려는 듯 야단스러운 행동을 했다.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 중심적이었다. 다른 사람의 생각 따윈 개의치 않았다. 밤이든 새벽이든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일을 해야했다. 새벽에 친구의 집을 찾아가 도박빚을 갚아달라고 했고, 모델이 10분만 늦어도 불같이 화를 냈다. 한 번은 믹 재거의 의뢰를 받아 그의 부인인 모델 제리 홀을 그린 적이 있는데, 넉 달 간의 작업 기간 동안 홀이 몇 차례 늦게 왔다는 이유로 그림 속 얼굴을 자기 조수인 데이비드 도슨으로 그려버렸다. 재거의 의뢰를 받은 화상은 재거에게 이에 대해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프로이드가 믹 재거 아내의 몸에 남자의 얼굴을 그려넣은 그 문제의 그림(1997)


그는 섹스의 화신이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여자가 찾아오면 욕실에 들어가 섹스를 했다. 그 사이 모델은 멀뚱히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어야 했다. 섹스를 끝낸 프로이드는 간단히 샤워를 한 뒤 알몸으로 나와 다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원하는 여자는 모조리 취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친구의 연인, 전 연인의 딸, 자신이 과속으로 모는 자동차에 치일뻔한 여자와도 사귀었다. 사귀는 기간 동안 여자들은 프로이드의 모델이 됐다.  


그 결과 프로이드에겐 제국의 왕처럼 많은 자식이 생겼다. 2번의 결혼으로 얻은 아내와 수많은 연인이 낳은 아이 중 프로이드가 자기의 자식으로 인정한 사람만 14명. 그러나 프로이드 친구들, 저널리스트들에 따르면 프로이드의 자식은 30~40명에 이른다고 한다. 프로이드는 피임을 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고,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프로이드의 다산을 홀로코스트의 공포에서 탈출한 유대계 남자의 심리와 연결시키는 시각도 있다. 20세기 전반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유대인이었던 할아버지 지그문트라면 자신의 괴물같은 손자를 두고 흥미로운 분석을 할 지도 모르겠다. 


프로이드의 모델이 되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프로이드가 정한 시간에 몇 달씩이나 찾아와야 했다. 프로이드는 한 부분부터 집중해서 느리게 조금씩 그려나갔다. 그렇게 관찰하면 마치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 생각,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듯이. 그림이 잘 되지 않으면 욕을 하거나 길길이 날뛰며 흥분하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그린 프로이드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정말 그 사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특히 사람의 꿈틀대는 생명과 물성이 2차원의 캔버스 바깥으로 전해진다. 


프로이드는 도박 중독자였다. 특히 경마에 미쳐 있었다. 빚 때문에 폭력배들에게 쫓겨 다니기 일쑤였다. 화상이나 부유한 친구들에게 도박빚을 갚아달라고 할 때는 "오늘 그 녀석들이 내 팔을 잘라버릴지도 몰라"라고 말했다. 허풍인지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프로이드가 곳곳에 엄청난 빚을 지고 다닌 것은 사실이다. 프로이드는 자신의 그림으로 도박빚을 대신 갚곤 했는데, 그 결과 마권업자 알피 매클레인은 프로이드의 그림 25점을 소유할 수 있었다. 이 마권업자는 졸지에 프로이드 그림의 최대 개인 컬렉터가 됐다. 프로이드는 미국 시장에서 인기를 끌면서, 즉 돈을 엄청나게 벌면서 도박을 끊었다. "더 이상 도박에 흥미가 없네. 돈을 잃어도 그다지 상처받지 않을 만큼 충분히 돈이 있기 때문이야." 어쩌면 도박은 돈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험, 두려움에 빠뜨리고 싶어서 한 일이었다. 



'잠든 연금 관리자'(1995). 2008년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이 작품을 3360만 달러에 구입했다. 생존 화가 중 최고가 기록이었다.  


프로이드는 17살이던 1940년 잡지 '호라이즌'에 자화상을 게재한 데서 시작해 2011년 <사냥개의 초상>을 미완성으로 남길 때까지 줄곧 그림을 그렸다. 추상, 키네틱 아트, 팝아트가 서구 미술계를 휩쓸고 지나가는 동안 프로이드는 줄곧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사람들은 프로이드의 초상화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겼지만, 프로이드는 개의치 않았다. 그가 따른 것은 오직 자기의 욕망과 스타일이었다. 그것이 구식이든, 비상식적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10대 딸의 누드화를 그리는 아버지는 어느 시대, 문화권에서도 기묘한 눈초리를 받을 수밖에 없지만, 세간의 시선이 프로이드의 그림이나 작업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었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상당히 피곤하겠지만, 그의 삶을 글로 읽고 그림을 감상하는 일은 흥분되면서 즐거운 일이다. 이런 사람을 '초인'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할 이유는 없다. 




청년, 노년기의 루시언 프로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