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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예술'에 침을 뱉어라, <모래그릇>

마쓰모토 세이초의 <모래그릇>을 읽어 나갈 때의 첫 느낌은 '의뭉스럽다'는 것이다. 직전에 정유정의 소설을 읽어서 더욱 대비가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마쓰모토는 사건을 진행시키다가 뜬금없이 엉뚱한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고, 또 사건과는 별 상관도 없는 듯한 등장인물들의 구체적인 일상을 슬며시 보여준다. 살펴보니 <모래그릇>은 1960년 5월 17일~1961년 4월20일 요미우리 석간신문에 연재된 소설이라고 하는데, 신문 연재소설의 느릿한 호흡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난 신문 연재소설보다는 일일 드라마를 떠올렸다. 정유정의 소설이 2시간 안에 승부를 보는 장편 극영화라면, 마쓰모토의 <모래그릇>은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중심 인물, 주변 인물 모두를 조금씩 풀어나가는, 그러다가 극의 완결성과는 상관 없는 쓸데없는 이야기가 들어가기도 하는, 그렇지만 그런 부분이 오히려 재미있기도 한 일일 드라마. (솔직히 최근 일일 드라마를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그럴 것 같다는 이야기다)


예전에 읽었던 다른 마쓰모토의 소설들처럼, 이 추리소설에서도 정작 추리는 허술하다. 많은 문제가 공교롭게도 형사 주변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건을 단서로 해 풀린다. 물론 주인공 형사가 우연한 해결을 기다리며 마냥 노는 건 아니다. 좀 옛날식 사고 같기는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어 나라가 발전하는구나'는 생각이 들 정도다. 2번의 지방 출장에서 이렇다할 실마리를 얻어오지 못하자, 형사는 개인 휴가를 내서 자비로 지방 출장을 간다. 상부에 비용과 시간을 청구하기가 송구스러워서다. 그렇게 야간 열차를 잇달아 타면서 쉬지도 않고 수사를 한 끝에, 돌아오자마자 또 출근을 한다. 그래. 그 정도로 했다면, 어설픈 추리나 우연에 기댄 사건 해결 같은 건 눈감아주지. 


60년대를 전후로 한 일본의 풍경이 흥미롭다. 일본이 큰 나라인지, 당시 기차가 느려서인지 모르겠지만, 형사는 스물 몇 시간 동안 기차를 탄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다. 요즘 같으면 시베리아 횡단 철도라도 탈 법한 시간이다. 밤기차를 타기 전에는 작은 병에 담긴 일본 위스키를 주머니에 넣는다. 그렇게 몇 모금 마신 뒤 잠을 청한다. 나보고 하라면 피곤해서 싫지만, 소설 속의 형사가 기나긴 시간 달리는 밤기차에 올라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은 꽤 운치 있다. 


늦은밤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오차즈케가 먹고 싶은데"라고 말하는 장면은 호기로우면서도 정겹다. 오뎅집에 가서 맥주를 먹는 장면도. 산토리사에 출시한 토리스 위스키를 베이스로 한 칵테일이 주력상품이라 '토리스 바'라고 불렸다는 서민적인 칵테일 바도 궁금하다. (추리소설을 읽으며 먹고 마시는데만 정신을 팔았군)


'새로운 예술'을 한답시고 떠드는 진보적 젊은 예술가 집단에 대한 경멸도 눈에 띈다. 작품 안에는 '누보 그룹'이라는 이들이 나오는데, 평론가, 소설가, 음악가, 건축가 등이 모인 집단이다. 이들은 읽어도 당췌 모를 듯한 현학적인 이론으로 새로운 예술을 옹호하고, 정련된 악기의 음이 아닌 기괴한 소음 덩어리를 음악이라고 부른다. 기성세대의 업적이나 체제의 권위를 부정하는 듯 하지만, 실은 누구보다 유명세와 권력에 목말라 있다. 가난해서 중학교 진학도 포기한 채 전기회사 사환으로 일했고, 교복을 입은 동년배를 보면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피해다녔으며, 그렇게 치열한 생활인으로 살다가 40대가 돼서야 소설가가 된 마쓰모토 세이초로서는, 20대에 이미 세상을 모두 아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이런 젊은 예술가들이 아니꼬왔을 것이다.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고도성장기에 접어들었던 60년대 초 일본에는 아마 그렇게 진보연하고 위선적인 젊은이들이 많았을테고. 그런 젊은이들의 모습에 눈꼴이 시려웠던 50대의 마쓰모토 세이초를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