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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지시한 대로 움직이기, <28>

*약 스포일러


한국 소설을 나오자마자 읽은 것은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일지도 모른다). 정유정의 신작 <28>을 읽었다. 


그의 전작 <7년의 밤>을 읽은 적이 있다.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 소설에 대해 할 말이 있는가. 모르겠다. 전문적인 평자라면 무엇이든 말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겐 그럴만한 꺼리가 없었다. 


<28>은 그보다는 할 말이 있다. 정유정은 책 출간을 전후한 인터뷰를 통해 구제역 파동에서 작품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언급했다. 살아있는 소, 돼지 등이 중장비에 매달린 채 거대한 구덩이 속으로 던져지는 그 풍경 말이다. 실제로 <28>은 '빨간 눈'이라 불리는 인수공통전염병이 창궐한 서울 인근의 가상 소도시 화양을 배경으로 한다. 개와 사람이 동시에 걸리는 이 병은 환자를 2~3일 내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 살아있는 사람을 살처분할 수는 없지만, 개는 그렇게 한다. 병에 걸렸든 안 걸렸든, 눈에 띄는 개는 일단 잡아 거대한 구덩이에 파묻어 버린다. 공무원 대신 착검한 소총을 든 군인이 구덩이를 지키고 섰다는 점만이 다르다. 그렇게 산 채로 흙속에 묻힌 개들의 울부짖음이 한참 후까지 들렸다고 작가는 전한다. 


작가는 말하지 않았지만, <28>이 연상시키는 풍경은 하나 더 있다. 아니, 난 구제역보다 이쪽이 더 강한 창작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5.18이다. 


'빨간 눈'의 원인도, 치료 방법도 밝혀지지 않자, 정부는 화양을 봉쇄한다. 작품에는 화양 바깥의 상황이 거의 나오지 않지만, '빨간 눈'이 크게 확산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랬다면 화양을 그토록 삼엄하게 봉쇄할만한 병력조차 남아있을 수 없었을테니까. 쉽게 말해 '봉쇄'지만, 이것은 그저 너희들끼리 앓다가 죽으라는 이야기다. 다만 그 병을 바깥으로만 퍼트리지 말라는 이야기다. 화양시민들은 분개한다.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고, 시청 광장에 집결한다. 그리고 평화 시위를 통해 봉쇄선을 뚫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봉쇄중인 군경은 이렇다할 반응이 없다. 이럴 때는 무반응이 가장 무서운 거다. 


1980년 5월의 광주도 그랬을 것 같다. 군사 정권은 광주를 봉쇄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그곳의 상황은 광주 바깥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외신의 드문 보도로, 전라도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의 풍문으로 일부 실상이 전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광주 바깥의 사람들은 모르거나, 모르는 척 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총성과 흐느낌에 귀막고, 그저 자신의 살 길을 찾았다. 화양 바깥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물론 <28>은 광주의 진상을 전하려는 소설이 아니다. 광주 전후의 사회, 정치적 맥락을 알려주는 소설도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외면하는 고립된 도시, 폭력과 약탈과 강간과 죽음이 지배하는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구제역과 광주라는 이질적인 모티브는 <28>에서 서로에게 비교적 잘 녹아들었다. 


작가는 <28>을 쓰다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지리산 자락 해발 700m 암자에 틀어박혔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16km씩을 걸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장편소설을 쓰는 건 체력전이에요. 내가 힘이 세야 이야기를 장악하고 내가 만든 세계에 인물을 풀어놓고 조절할 수 있거든요. 심신이 미약하면 편한 길로 가려 해요. 산을 뚫어야 하는 데 길을 돌아가는 거죠. 힘이 없으면 캐릭터가 제멋대로 돌아다녀요.”(중앙일보 인터뷰)


<28>은 그곳에 들어온 독자를 장악하는 소설이다. 작가는 자신의 세계, 인물을 '조절'한다고 했지만, 그 세계에 발딛고 인물의 행동을 따라가는 독자 또한 작가에게 '조절'될 수밖에 없다. 아마 그런 소설을 두고 '잘 읽힌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난 작가의 그토록 강력한 장악력이 조금 불편했다. 각자의 극한 상황에 빠진 사람, 동물을 정밀하게 보여준 뒤, "생생하지 않은가. 당신이 경험하지 못한 삶, 느끼지 못한 감정 아닌가"라고 외치는 것 같다. 이런 태도로 쓰여진 글을 읽다보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작가가 등 뒤에서 지시하는 방향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이걸 그르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싫다고 중얼거릴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