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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잊어도 좋은 기억, 몰라도 좋은 사실

며칠전 퇴근길에 지하철을 탔다가 들은 대화다. 둘은 부부로 추정됐다. 남녀는 연예인 이야기를 꺼냈는데, 대화는 그들이 출연한 영화로 이어졌다. 


남: 엄태웅이 이민정하고 <시라노 연애조작단>에 나왔네. 

여: 봤어?

남: 음...기억이 안나. 

여: 누구랑 봤어?

남: 안본 것 같아. 


여자는 3초 정도 침묵하다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렇게 가정의 평화는 유지됐다. 


기억력은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이 좋다고들 여기지만, 때론 잊어도 좋은 기억들이 있다. '트라우마'라 할만한 끔찍한 사건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50년전, 100년전, 200년전의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자극에 노출된 채 살아간다. 그러한 자극들은 우리의 기억에 자꾸만 쌓인다. 그 많은 기억을 고스란히 쌓아두는 인간은 아마 미쳐버리지 않을까. 쓸데없는 프로그램과 파일을 잔뜩 간직한 채 버벅대는 컴퓨터처럼.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기억에 연관된 드라마 한 편을 보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채널4에서 방영된 '블랙 미러' 시즌 1의 세번째 에피소드 '당신의 모든 역사'다. 이 에피소드 속에서 사람들은 귀 뒤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두 저장할 수 있는 칩을 박아두었다. 그리고 확인이 필요할 때마다 조그만 리모컨을 이용해 자신의 눈 안에서 재생하거나 아니면 브라운관에 띄워 타인과 함께 본다. 예를 들어 입사 면접을 하고 돌아온 남자는 다른 사람에게 그 면접 영상을 보여주며 평가를 부탁한다. 아이를 보모에게 맡긴 뒤 외출하고 돌아온 부모는 아이의 시각을 재생해 보모의 학대 행위가 있었는지 살핀다. 공항의 검색원은 "지난 24시간의 기억을 64배속으로 돌려 주시겠습니까" 같은 요구를 한다. 



과거 기억을 재생하기 위한 인터페이스. 그리 쿨하진 않다. 


기술은 신식이지만 감정은 구식이다. 이 에피소드의 갈등은 지금까지 남녀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 수많은 작품과 비슷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즉 질투와 의심이다. 남편은 아내와 함께 이웃이 초대한 파티에 갔다가 아내와 주인 남자 사이의 시선에 묘한 기류가 흐름을 느낀다. 주인 남자의 시시한 농담에 아내는 유쾌하게 반응하고, 주인 남자와 스스럼없는 미소를 짓던 아내는 자신을 보고 얼굴이 굳는다. 남편의 느낌일 뿐일까. 과거의 남편 같으면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돌이키고 말겠지만, 이 에피소드의 남편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고스란히 재생할 수 있다. 그는 주인 남자의 농담에 아내가 크게 웃는 장면을 브라운관에 재생한 뒤 보모에게 "저 농담이 웃긴지 안웃긴지 말해봐"라고 평가를 부탁한다.


남편은 집요한 탐색을 거듭한 끝에 자신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 몇 가지 장면들을 찾아내 아내를 추궁한다. 그리고 아내의 과거 영상을 재생한다. 마치 "나랑 만나기 전에 어떤 남자랑 만났어? 그 남자 좋았어?"라고 집요하게 물은 뒤 답을 받아내는 사람처럼.



뜨거웠던 옛 추억들을 각자 재생한 채 관계하는 부부


찌질한 남자들의 행동은 기술의 발전과 상관 없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단 걸까. 내가 지하철에서 만난 부부와 달리, <블랙 미러>의 남자는 잊어도 좋은 걸, 알지 않아도 좋은 걸 기억하고 알아내려 했다. 


진실 앞에 눈감는 건 비겁한 행동이다. 불편하다 해도 알아야할 과거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격언들이 남녀 사이에도 반드시 적용되는 건 아니다. 남녀 문제에 있어 진실은 상대적이다. 과거의 진실한 감정이 현재에도 진실하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현재의 관계가 그보다 진실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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