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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만큼 받을까, 살만큼 받을까,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짧은 분량, 쉬운 서술로 '비주류 경제학'(이지만 언젠가는 주류가 되라!)의 이론들을 전한다. 리뷰에도 자세히 썼지만, 특히 임금에 대한 정의가 흥미로웠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가 무슨 뜻인지 이제서야 대략 짐작.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류동민 지음/웅진지식하우스/279쪽/1만3000원


경제학은 깔끔하다. 가격 형성 과정을 떠올려보자. 수요가 늘어나면 가격이 오르고, 공급이 늘어나면 가격이 내린다. 수요와 공급의 선이 엇갈려 가격을 결정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그래프는 수학적으로 명쾌하고 시각적으로 단정하다. 


그런데 우리 삶은 경제학처럼 깔끔하지 않다. 오히려 빈 틈이 많고 너저분하다.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지 않을 때면 시장조정 과정을 통해 균형이 회복된다”는 표현을 살펴보자. 이 문장 속 ‘균형 회복’의 과정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을 수도 있다. 


19세기 이후 경제학은 물리학을 닮으려 노력했다. 물리학은 간단하게 정리된 수식으로 사물의 이치를 설명한다. E=mc2(제곱약물임)이란 공식으로 세상이 정리된다니 얼마나 간결한가. 그러나 원자는 충돌해도 아픔을 느끼지 않지만, 인간은 ‘시장조정 과정’에서 고통을 당한다. 


경제학의 용어들은 ‘가치중립적’ 혹은 ‘현상설명적’임을 자처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사용되는 ‘노동 유연화’라는 용어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은 채용과 해고의 유연화를 말하려는 것이다. ‘경영의 효율성 제고’란 말 역시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임금 삭감, 근무시간 연장 등을 뜻한다. ‘가격현실화’란 사실 ‘가격인상’이다.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은 이렇게 ‘주어가 없는’ 경제학 용어의 주어를 돌려주고, 사람의 흔적이 없는 경제학에서 사람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인 저자가 한 번도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 책의 메시지는 “경제학은 휴머니즘이다”라고 할 수 있다. 


거시경제의 지표, 숫자와 기호로 구성된 복잡한 수식 뒤에는 일하는 사람들,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있다. 연봉 7000만원의 직장 입사를 꿈꾸는 반도체학과 대학생, 문자메시지로 해고 통고를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 잦은 해외 출장으로 축난 몸을 지키려 여가 시간에 헬스클럽에 다니는 샐러리맨, 하루 100군데 배달해야 일당을 맞추는 택배 노동자, 아르바이트생 인건비를 벌기 위해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 주인이 저자의 시선에 포착된다. ‘노동’이라는 프리즘으로 이들의 삶을 포착하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이 책은 우리의 ‘통념’과는 어긋난 경제학 지식들을 전해준다. 이 시대의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무엇일까. 이는 학생에게 요구되는 덕목과 같다. 정답은 ‘지루함을 참아내는 능력’이다. 커다란 공장 혹은 학교에서, 자신과 비슷한 마음을 먹은 사람들과 함께, 같은 시간에 일 혹은 수업을 시작해 같은 시간에 끝내고, 다음날 다시 같은 시간에 출근 혹은 등교한다. 100명의 몸과 마음은 100개인데, 이들에게 하나의 행동 양식을 요구한다. 물론 이러한 시간관리, 행동관리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길들줄 아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목표다. 


재벌과 그들이 다스리는 기업은 자신들을 위한 특수 이익을 마치 보편 이익인 것처럼 꾸민다. 어느 경제신문이 주관하는 ‘경제이해력검증시험’에는 이런 문제가 나왔다. “다음 중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규제가 무엇인지 고르시오”. 정답은 ‘대기업 집단의 상호출자 금지와 출자총액 제한’이었다. 저자는 이것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뽑아놓고는 이를 ‘한국식 민주주의’라고 선전한 1970년대 독재정권의 교과서가 연상되는 궤변이라고 지적한다.  


이렇게 자본가와 그들을 대변하는 세력의 집요하고 은밀한 공세 때문에 바뀐 용어들이 몇 가지 있다. 전통적으로 노동자의 반대쪽에 서있는 이는 ‘자본가’였지만, 요즘은 자본가라는 말 대신 ‘사용자’라 칭하는 경우가 잦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고용함으로써 그와 ‘관계’를 맺지만, 사용자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매한다. 여기서 노동력은 노동자라는 한 고유한 개인의 인격과 분리돼 상품처럼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된다. 이제 인간 사이의 ‘관계’는 ‘거래’로 바뀐다. 


이 책이 탐구하는 ‘임금’에 대한 정의도 흥미롭다. 예수 그리스도는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들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오후 다섯시쯤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었다. 아침에 나온 사람은 당연히 불평했다. 포도원 주인은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주는 것이 내 뜻이오”라고 말했다. 


이 비유를 염두에 두고 임금의 정의를 생각해보자. 임금은 한 일에 대한 대가인가,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금인가. 그러니까 노동자가 일한 만큼만 돈을 줘야 하는가, 아니면 그가 다음날에도 일할 수 있도록, 즉 가족을 건사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을 만큼의 돈을 줘야 하는가. 아침에 온 일꾼처럼, 즉 임금이 생산의 기여분에 정확하게 비례하는 것이라고 보기 위해선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노동자 한 명이 생산에 기여한 바를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을 것. 그러나 자동차 한 대를 만드는데 하루에 8시간 일한 노동자가 얼마나 기여했는지 그 비율을 정할 수 있는가. 혹은 경향신문이 발행되는데 기여한 어느 기자의 노력을 수치로 환산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다음 노동자의 기여와 생산된 가치가 같은 시간의 지평을 가지고 움직일 것. 즉 노동자가 하루 8시간 일했다면 그날 하루동안 생산된 생산물에만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노동은 세월에 따라 누적된다. 10년간의 경험을 가진 숙련된 재봉사가 하루 10벌의 옷을 만들었다고 할 때, 이 10벌에는 그날의 노동 뿐 아니라 그의 10년 경력이 함께 담겨있다. 그러므로 두번째 조건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이에 저자는 임금은 하루 노동의 대가라기보다는 노동 능력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대가로 봐야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들은 임금이 “그때그때의 노동에 대한 그때그때의 보상”이라는 원칙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비정규직이 늘어난 것은 그 사례다. 반면 “주어진 시간 동안 주어진 장소에서 일하는 것”이라는 노동 계약은 무너뜨리고 있다. 야근은 물론, 퇴근 후나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오늘의 노동자다. 심지어 주말에 회사가 주최하는 체육대회에 나오라는 식으로 노동자의 일상까지 통제한다. 


자본가가 ‘사용자’로 변신했다면, 노동자는 ‘소비자’로 바뀌었다. 24시간 영업하는 대형 마트는 싸고 편하게 장을 보려는 소비자의 욕구에 부응한다. 그리고 늦은 퇴근 시간 후 한 푼이라도 아껴 장을 보려는 이들은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다. 마트에서 소비자가 된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의 고통에 힘입어 생계를 유지한다. 노동자이자 소비자라는 이 두 얼굴은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 같다. 마트 노동자가 한밤에도 근무하도록 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로 심야의 마트행을 자제한다면? 소비자로서 비합리적인 경제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신제도주의’라는 경제학 이론이 있다고 한다. 이 이론은 “조직을 유지함으로써 드는 거래비용이 지나치게 커지면 기업 활동의 일부가 떨어져나가 시장 거래로 바뀌는 경향”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어느 대기업이 자사 제품을 홍보하는 조직을 직접 꾸리는 것보다 홍보 회사에 위탁하는데 드는 비용이 싸다면, 홍보 조직이 기업에서 떨어져나가는 식이다. 이후 대기업과 홍보 회사는 기업 내부 지휘 관계가 아니라 광고주와 광고 회사의 거래 관계로 변하지만, 둘 사이의 상하 위계는 그대로다. 


현재 우리 사회의 많은 경제 모델이 그렇다. 택배 기사, 대형 마트에 상품을 납품하는 영업사원, 대리운전 기사, 출판사의 기획위원 등은 형식상 개인사업자이지만, 사실상 ‘갑을 관계’로 종속돼 있다. 노동자는 실패의 위험성은 스스로 지고, 일의 자율성은 누리지 못한다. 저자는 이를 ‘유흥주점형 경제 모델’이라고 부른다. 룸살롱에는 업주-웨이터-마담-접대부의 위계가 있지만, 이들이 고용-피고용 관계가 아니라 개인 간 거래관계라는 점에서 따온 말이다. 


그래서 추상의 경제학에 구체의 인간을 돌려놓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저자는 지금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실천’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저자는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기’가 어렵다면 소극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기’에서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조언한다. 여기에서 견고해 보이던 일상에 대한 ‘균열 내기’가 시작된다. 


“소비자로서의 정체성과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이 맞설 때 가끔씩이라도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의식하도록 노력하는 것, 비정규직 노동을 반면교사로서가 아니라 최소한 배려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일을 ‘밥벌이의 지겨움’으로서만이 아니라 삶의 소중한 순간으로 받아들이는 것,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잠깐씩이라도 만들어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우리의 일과 삶을 더디게나마 바꾸어나갈 것이다.”


예를 들어 ‘마트 안가기’는 어떨까. 나 하나 대형 마트에 가지 않는다고 당장 전통 시장이 살아나거나 마트의 부당한 노동자 대우 관행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마트에 가지 않는다면 나만 불편해질 뿐이다. 그러나 때로는 ‘의지적 낙관’이 필요하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불가능하다. 한두 사람이라도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때, 언젠가는 그 꿈들이 모여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다.”


비주류 경제학의 이론들을 현실의 문제에 빗대 친근하고 조곤조곤하게 설명한다. 세상을 송두리째 바꿀 방안을 찾는 사람에게는 ‘개인적 차원의 실천’을 말하는 결말이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