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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영화는 묻는다

복수는 가깝고 용서는 멀다

복수는 인간의 것입니까.

맞으면 때리고 싶고, 빼앗기면 다시 뺏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이번주 개봉작인 <왼편 마지막 집>은 매우 인간적인 감정인 복수에 대한 영화입니다. 아들을 사고로 잃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가족들은 호숫가 산장으로 주말 여행을 떠납니다. 딸 메리는 자동차를 가지고 시내의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가 살인을 저지르고 탈주중인 범죄자 무리와 엮입니다. 친구는 살해당하고 메리는 성폭행을 당한 뒤 도망치다가 총탄에 맞아 쓰러집니다. 폭풍우에 자동차마저 고장나 산 속에서 길을 잃은 범죄자 무리는 메리의 가족이 머물고 있는 산장을 찾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메리의 부모는 이들에게 친절을 베풉니다. 이들이 잠을 자러 별채로 간 사이, 부모는 문 바깥에서 총탄에 맞아 죽어가는 메리를 발견합니다. 부모는 별채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이들이 범인임을 알아챕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 영화의 족보는 조금 복잡합니다. 영화는 웨스 크레이븐의 동명 작품(1972)을 리메이크한 것이며, 크레이븐은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처녀의 샘>(1961)에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베르히만은 스웨덴 구전 민요에 바탕해 영화를 찍었고요. 시대를 달리하며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이 이야기의 호소력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유린당한 딸이 부모의 품 안에서 가쁜 숨을 몰아쉽니다. 옆집에는 원수들이 무방비로 잠들었습니다. 손아귀에는 복수의 도구가 놓였고, 공권력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제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 보입니다.

성경은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기록되기를 ‘원수를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아 주겠다’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서 12장 19절)라고 이릅니다. 죗값을 묻는 것은 신이 할 일이니, 인간은 용서를 하란 메시지입니다. 근대의 국가 역시 사적(私的) 복수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얻어맞으면 직접 가서 주먹을 돌려주는 대신, 경찰에 고소를 해야 합니다. 공권력이 개인의 복수를 대신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 속 주인공은 신에게 기도하거나 경찰서를 찾지 않고 직접 손에 피를 묻힙니다. 영화는 때로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힘든 관객의 욕망을 충족시킵니다. 신의 징벌이나 공권력의 집행을 기대하는 것으론 응어리진 복수심을 풀어낼 수 없기에, 관객은 영화 속에서나마 직접적인 복수를 꿈꿉니다.

황지우 시인은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시의 첫 머리에서 “자공(子貢)이 물었다. 선생님,/한 생(生)이 다하도록 해야 할 게 있다면/그게 뭘까요. 선생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바로 말했다./그거? 용서하는 거야”라고 읊었습니다. 시인은 한 시대를 이끈 지도자의 가장 훌륭한 덕목으로 ‘용서’를 꼽은 것입니다. 복수는 가깝지만 용서는 멉니다. 머나먼 용서에 다다른 이야말로 진정 ‘거인’이라고 우러러도 마땅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