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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파격, <스타 워즈: 깨어난 포스>





**스포일러 있음


J J 에이브럼스가 바톤을 넘겨받은 스타워즈 신작 <깨어난 포스>를 봤다. 줄거리의 이음새가 자연스럽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며, 어색하지 않은 컴퓨터 그래픽 화면이 연말 극장가의 한 자리를 차지할 상업영화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솔직히 불만이 있다. 이런 식이라면 에피소드 7, 8, 9가 아니라 70, 80, 90도 만들 수 있다. <깨어난 포스>의 구도는 에피소드 4와 거의 비슷하다. 다른 등장인물이 등장해 앞선 영화와 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드로이드가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고, 자신의 힘을 깨닫지 못한 영웅이 있고, 결국 이 영웅이 힘을 깨닫고 수련해 가는 과정을 예기하며, 악당은 대체로 한 점의 반성도 없는 순수 악 그 자체이지만, 그 중 행동대장 격인 인물은 일말의 망설임이 있다. 심지어 아버지 한 솔로가 아들 카일로 렌에게 찔리는 장면은 아들 루크 스카이워커가 아버지 다스 베이더에게 패배하는 장면의 패러디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루크가 다스 베이더에게 당할 때만큼의 비장함은 없다) 



쓸 필요 없는 가면을 쓴 카일로 렌 


아마 원작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을 것 같다. <스타워즈> 시리즈는 팬덤, 관련 산업의 규모, 문화적 영향력 측면에서 20세기 영화산업의 최고 히트작이라 할만하다. 원작 팬의 심기를 거스를 일을 하기는 사실상 힘들었을 것 같다. 감독은 이전 시리즈를 안 본 관객도 즐겁게 볼 수 있게 만들었다고 했고 그 말도 맞긴 하지만, 새 관객과 옛 관객이 느끼는 감격의 크기는 비교가 안될 것이다. 한 솔로와 추바카가 밀레니엄 팔콘 호에 올랐을 때, 한 솔로와 레아가 만났을 때, 레이가 루크의 라이트 세이버를 발견했을 때, 그리고 레이가 은둔한 루크를 찾아 그 라이트 세이버를 건냈을 때의 감격은 전작에 익숙한 관객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사다리꼴로 올라가는 자막은 물론이고. 



이 분들 처음 나왔을 떄 우는 사람 있었을듯. 해리슨 포드는 정말 좋은 배우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퍼스트 오더의 기계같은 군인으로 훈육됐던 핀이 동료의 피를 본 뒤 각성해 스톰 트루퍼를 탈출한다는 설정은 흥미로웠다. 스타워즈에서 피가 명시적으로 나오는 건 아마 처음이고, 핏줄 혹은 운명에 의한 각성이 아닌 상황에 따른 각성을 한 인물도 핀이 처음인 것 같다. 다만 무고한 인간들을 죽이는게 싫어 군대를 벗어난 그가 옛 동료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이는 모습은 이상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깨어난 포스>는 앞선 시리즈의 광휘를 고스란히 물려받겠다는 선택을 했지만, 몇 가지 변화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것은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 어쩌면 이 변화 하나가 혁명적이다. 처음 보는 영국 여배우인 데이지 리들리가 연기한 레이란 인물은 (아마 앞으로 밝혀질)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며, 수년간 수련을 쌓은 카일로 렌이 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포스를 갖고 있으며, 탁월한 비행술과 수리 능력도 갖고 있다. 아나킨 스카이워커, 루크 스카이워커도 보여주지 못한 능력을 레이가 보여준다. 분명한 영국식 액센트를 사용하고, 그래서인지 어딘지 젊은 시절의 키이라 나이틀리를 연상케하는 이 배우는 단선적일지라도 똑부러지게 제 역할을 해냈고, 그래서 루크 스카이워커의 법통을 이어받는 이가 여자라는 파격을 잊게 만든다. 레이가 우마 서먼처럼 칼질을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카일로 렌, 핀, 스노크보다 레이가 겪을 운명이 더 궁금하다. <스타워즈>에 여자 주인공이 나온 마당에, 007을 여자로 만들거나, 배트맨 시리즈가 망하고 캣우먼 시리즈가 득세하지 말란 법도 없다. 하긴 <헝거 게임> 시리즈의 제니퍼 로렌스가 이미 여성이 주인공인 액션 영화의 가능성을 보이긴 했다. 레이와 핀의 관계가 로맨스가 아니라 우정처럼 보인다는 점도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깨어난 포스>의 여성 주인공은 '신의 한 수'같고, 나는 이 점이 아니었으면 이 영화를 별로 재미있게 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신의 한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