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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배우를 말한다

김혜나, 박희본, 김꽃비. <돼지의 왕>의 여배우들+<돼지의 왕> 리뷰


의상 쇼핑몰 본투본 대표 박희본씨, 뮤지컬 배우 김혜나씨, 일본과 프랑스에서 영화를 찍는 월드스타 김꽃비씨(왼쪽부터) /강윤중 기자

애니메이션에서 여자 성우가 소년 목소리를 맡는 일이 드물지는 않다. 그러나 세 여배우가 돼지같이 굴욕적이고 개처럼 폭력적인 남자 중학생의 목소리를 연기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에서 목소리 연기한 배우 김혜나(31), 박희본(28), 김꽃비(25)를 만났다. 김혜나는 악바리 같은 성격으로 교실 내의 혁명을 주도하는 김철, 박희본은 중산층의 나약한 황경민, 김꽃비는 가난하고 과묵한 정종석 역을 맡았다. 연상호 감독은 변성기 전의 중학생 목소리 연기를 애초부터 전문 성우가 아닌 여배우에게 맡길 생각을 하고, 이들에게 대본을 보냈다고 한다.

“대본을 받고 재미있게 읽었는데 아무리 봐도 여자 역할이 없는 거예요. 알고보니 철이 역할을 맡아달라는 거였어요. 하고는 싶은데 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어요.”(김혜나)

“전 여자 배역이 없기에 아예 극중 고양이 대사를 미리 연습했어요.”(박희본)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국내와 해외를 오가며 연기를 해온 이들이었지만 애니메이션 목소리 연기는 쉽지 않았다. 김혜나는 “우습게 보고 녹음하러 갔다가 큰 코 다쳤다. 녹음을 하는데 식은 땀이 다 났다”고 말했다. 박희본은 “미리 그려진 그림에 입을 맞추면서 너무 꾸며진 것처럼 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위 세사람이 연기한 경민(박희본), 철(김혜나), 종석(김꽃비·위로부터).


극중 인물들은 모멸, 폭력, 비굴, 배신, 가난, 살육으로 점철된 중학 시절을 보낸다. 이 거칠고 속된 남자 아이들의 이야기에 여배우들이 공감할 수 있었을까. 김꽃비는 “구체적인 폭력의 양상은 다르겠지만, 계급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사건들은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남녀공학 중학교를 나온 김혜나는 만나는 남자마다 ‘본드 해봤냐’고 물었고, 결국 한 남자 선배로부터 ‘내 친구의 경험’이라는 전제 아래 30분간에 걸쳐 그 느낌을 생생히 들은 뒤 목소리 연기에 참조했다고 한다.


김혜나, 박희본, 김꽃비가 함께 녹음한 시간은 단 이틀. 그러나 주거니 받거니 화기애애 이야기하는 셋의 모습에선 풍문으로 전해지는 여배우들의 ‘자존심 싸움’ 대신, 좋은 영화에 출연한 기쁨만이 흘러 나왔다.

이런 장면으로 시작하는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 "작심을 했다"고 보면 된다.


**<돼지의 왕> 리뷰
한국의 장편 애니메이션이라고 해서 <마당을 나온 암탉>을 떠올리며 극장에 가는 관객은 없어야겠다. 3일 개봉하는 <돼지의 왕>은 피, 약물, 죽음, 그리고 그보다 심한 감정의 굴곡을 그린다. 학창시절의 폭력, 계급 갈등을 그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말죽거리 잔혹사>를 3배쯤 그로테스크하게 만들면 <돼지의 왕>이 될 것 같다.

거실의 식탁에는 목에 굵직한 자국이 난 여성이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다. 샤워실에서는 그의 남편 경민(오정세)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고, 가구와 가전제품에는 압류품임을 뜻하는 빨간 딱지가 온통 붙어 있다. 경영하는 회사가 부도난 경민은 절망적인 현실을 뒤로 한 채 오랜 시간 연락이 끊긴 중학 동창 종석(양익준)을 찾아나선다. 15년 만에 만난 경민과 종석은 술잔을 나누며 끔찍했던 중학 시절을 돌이킨다. 중학교는 교사의 사랑, 폭력, 권력을 모두 쥔 소수의 아이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경민과 종석은 자신들은 ‘돼지’이고, 그들은 ‘개’라고 여긴다. 그러던 경민과 종석 앞에 무서워하는 것 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철이가 등장한다. 철이는 순식간에 ‘돼지의 왕’으로 떠오른다. ‘개’와의 시비 끝에 퇴학을 당한 철이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복수를 계획한다.

'돼지의 왕' 철이와 그를 방관하는 그냥 돼지들.

<돼지의 왕>이 그리는 남중 교실은 거의 ‘지옥’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15년이 흘러 성인으로 발디딘 세상도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경민은 삶의 궁지에 몰렸고, 작가를 꿈꾸던 종석 역시 대필작업 하나 제대로 못해 편집자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처지다. 중학 시절의 철이는 혁명의 주도자이자 삶의 구원자였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영웅이 세상을 바꿀 수 없듯이, 철이 혼자 ‘개와 돼지’의 서열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철이는 1%의 권력자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악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1%는 세상 모든 가치의 주도권까지 쥐고 있었다. 물론 악도 1%가 쥔 가치의 하나다. 영화는 이 한줌 희망 없이 비관적인 관점을 조곤조곤 설득시킨다.

<습지생태보고서>의 최규석 작가가 초기 캐릭터 디자인을 맡았고, 여러 중·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주목받아온 연상호 감독이 연출 데뷔했다.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돼 아시아 영화진흥기구상, 한국영화감독 조합상, 무비꼴라쥬상 등을 받았다.

'왕'이 없으니 지들끼리 싸우는 그냥 돼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