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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보다 큰 것이 있다-존재하는 신



50여년간 무신론을 옹호했던 철학자가 세상을 뜨기 3년전 유신론자가 됐다. 그는 “과학적 증거에 근거해 신을 믿게 됐다”고 밝혔다. 2007년 출간된 <존재하는 신>에서 영국의 철학자 앤터니 플루는 무신론에서 유신론으로 옮겨간 자신의 지적 궤적을 서술했다.

‘신의 존재’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철학사를 관통하고 근래에는 과학자까지 끌어들여 판을 키운 복잡한 주제지만, 플루는 이 책에서 논쟁의 역사를 비교적 알기 쉽게 정리한다. 원제 역시 간단히 <There is a God>이다.


플루는 우선 감리교 목사의 아들이었으나 무신론으로 끌린 지적 배경을 설명한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전능하고 완전하고 선한 신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는 불완전과 악에 모순된다’는 이유로 동급생들과 논쟁을 벌였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이후에는 논의가 더 섬세해졌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을 정점으로 해 당대 철학계를 휩쓴 분석철학의 세례를 받은 플루는 “논의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구체적인 신 개념을 식별할 방법이 정해지기 전에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이유에 대한 토론도 시작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플루가 무신론 진영에 기여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무신론 추정>에서는 신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신이 없다고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피의자는 무죄 가능성이 있으므로, 재판에서 최종적으로 유죄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무죄 추정’ 원칙과 비슷한 논리다.


2004년 5월 열린 심포지엄에서 플루는 극적으로 회심했다. 이전에도 몇 차례 무신론 진영을 대표해 대규모 청중 앞에서 토론회를 벌인 적이 있는 플루는 그의 마지막 공개 토론회에서 ‘신의 존재를 받아들인다’고 선언했다. 심포지엄은 반대 의견이 오가는게 아니라 고등한 지성의 존재를 살피는 자리가 됐다. 플루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연구 성과를 본 뒤 창조적인 지성의 활동을 믿게 됐다고 털어놨다. 생명을 만들어내는데 필요한 믿을 수 없이 복잡한 DNA 배열을 최초로 설계하기 위해선 어떤 지성의 개입을 전제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우주의 형성 과정도 마찬가지다. 빛의 속도나 전자의 질량 같은 상수의 값이 조금만 달라졌다해도, 인간의 진화를 허용하는 행성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즉 ‘우주는 인간이 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물론 제도 종교에 대한 실망과 불신 때문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핵무기 확산이 나쁘다고 해서 E=mc²이란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 건 아니다.


플루는 ‘저기 바깥’에 있는 존재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플루가 신을 믿는 과정에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개입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플루의 입장은 ‘이신론’(理神論)에 가깝다.


그러나 플루가 내세운 유신론에 대한 증거들이 그가 무신론자로 살았던 50여년간 전혀 본 적 없는 것들일까. 최신과학의 관찰결과야 그렇다 치더라도, 철학적 논리는 수천년간 지속된 것들이 세련되게 다듬어진 정도다. 결국 그의 전회는 ‘시비’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처럼 보인다. ‘과학이 설명하기에는 너무 큰 것이 있다’는 말은 이 선택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깨달음이다. 홍종락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