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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배우를 말한다

‘엘라의 계곡’ ‘일렉트릭 미스트’ 토미 리 존스

토미 리 존스(63)는 늙고 고지식한 경찰입니다. 논두렁처럼 깊게 팬 주름살은 이 늙은 경찰이 세상에 대해 짊어진 근심에 비례합니다.


공교롭게도 토미 리 존스가 주연한 영화 2편이 한 주 간격으로 잇달아 개봉했습니다. 지난주 개봉한 <엘라의 계곡>은 지금까지 미국에서 나온 수많은 이라크전 영화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감성과 세계를 파악하는 이성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진지함 때문에 2007년작인 이 영화가 한국에선 가까스로 지각 개봉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영화에서 존스는 조국의 이상에 대한 신념, 군인으로서의 명예에 가득찬 전직 군 수사관 행크 역을 맡았습니다. 행크는 아들 마이크가 군인이 되길 바랐고, 아버지의 바람대로 마이크는 입대해 이라크전에 파병됐다가 귀국합니다. 그러나 마이크는 외출을 나갔다가 귀대하지 않고, 행크는 탈영 처리될 위기에 놓인 아들을 직접 찾아나섭니다.


이번주 개봉한 <일렉트릭 미스트>(사진)에서 토미 리 존스는 늙은 형사 데이브입니다.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19세 여성이 살해당합니다. 수사를 맡은 데이브는 사건이 인근의 영화 촬영장에서 발견된 유골 더미와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브의 동분서주에도 불구하고 마을에서는 두번째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두 영화에서 토미 리 존스는 모두 경찰 혹은 관련계통에 종사합니다. 돌아보면 토미 리 존스의 품에는 언제나 경찰 배지가 숨겨져 있을 것 같았습니다.


<도망자>(1993)에선 누명쓴 용의자 해리슨 포드를 집요하게 뒤쫓았고, <맨 인 블랙>(1997)에선 지구에 망명한 외계인을 관리·감독하는 특수기관 요원이었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8)에선 악마 같은 살인자와 쫓기는 도망자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늙은 경찰이었고요.


그러나 토미 리 존스는 미국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능글맞고 유머 넘치는 형사가 아니었습니다. 환히 웃는 모습을 거의 보여준 적이 없고, 썩어들어가는 세상에 대해 한탄했습니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원칙에 집착해, 때로 주위와 마찰을 빚기도 했습니다. <엘라의 계곡>이나 <일렉트릭 미스트>에서 토미 리 존스는 수사를 방해하는 주위 환경에 굴하지 않고 끝내 사건의 실체에 근접합니다.


비슷한 이미지의 배우로 우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때로 황야의 무법자였고, 때론 난폭한 경찰이었습니다. 범죄자와 법집행자의 이미지를 절반씩 거쳐온 이스트우드는 이제 세상의 밝음과 어두움을 모두 포용하는 현인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스트우드의 원칙이 세상을 아우르는 지혜인 반면, 존스의 원칙은 직업인으로서의 윤리에 가깝습니다. 존스의 행동이 이스트우드에 비해 갑갑하게 느껴진다면 바로 이러한 ‘융통성 없는 공무원’ 이미지 때문일 겁니다. 아무래도 이스트우드가 존스보단 한 수 위라고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일 테고요.


그러나 이 세상엔 존스같이 꼿꼿한 직업인이 필요합니다. 조직 내의 정치 논리나 조직 외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오직 오랜 세월 일터에서 겪어낸 윤리와 원칙에만 충실한 그런 노인. 코엔 형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비관했지만, 저는 그런 늙은 원칙주의자야말로 사회의 중요한 축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