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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 속 생존 실험 보고서, <레버넌트>



***스포일러 있음. 


'영화적인 영화' 혹은 '시네마틱한 경험'이란 무엇인가. 이론가들은 이를 두고 몇 시간을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감각적으로 '큰 스크린에서 보고 싶은 영화인가'라고 자문한다. 얼마전 본 <헤이트풀3>이 그랬다. 눈덮인 벌판을 달리는 마차가 나오는 첫 장면부터 "더 큰 스크린에서 볼 걸" 하고 후회했다. <헤이트풀 8>은 절반 이상이 넓지 않은 실내에서 펼쳐지는 영화지만, 그래도 이를 담는 스크린이 커야 볼 맛이 난다. 




<레버넌트>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 영화는 대부분 실외 촬영이다. 백인에 의해 개발되기 이전의 북미 서부 지역의 광활한 자연을 배경으로 힘없는 인간 몇 명이 피비린내 나는 생존 투쟁을 벌인다. 자연에는 자비심이 없다. 그 속에 내쳐진 인간의 힘겨운 투쟁을 강조하기 위해 카메라가 자주 쓰는 테크닉은 급격한 패닝이다. 카메라는 인물의 표정에서 출발해 주변을 한 번 훑고 다시 인물로 돌아오곤 한다. 자연에 내쳐진 인간의 왜소함, 고독감이 강조된다. 당연히 큰 스크린일수록 좋다. 요즘 개발됐다는 3면 스크린이면 더 좋을지 모른다. 


회색곰에게 습격당해 죽기 직전인 사냥꾼 휴 글래스는 길을 재촉하는 사냥꾼 동료 피츠제럴드에게 버림받는다. 피츠제럴드는 휴의 아들을 죽이고, 휴를 산 채로 땅에 반쯤 묻은 채 그대로 길을 떠난다. 가까스로 몸을 추스린 휴는 추위, 굶주림, 아메리카 인디언의 추격에 고통받으며 복수를 위한 여정을 떠난다. 휴는 "숨쉬는 한 싸운다"는 신념을 가진 인물인데, 그래서 그가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여러가지 일들이 현대 문명에 익숙한 관객을 괴롭게 한다. 죽은 사슴의 뼈대에 붙은 작은 고깃조각을 훑어먹고, 버팔로의 생간을 먹고, 죽은 말의 내장을 파낸 뒤 그 가죽 안으로 들어가 추위를 버틴다. 물고기를 잡자마자 날 것으로 그대로 뜯어먹는 대목도 있다. 야생의 동물과 다름없다. 






휴가 회색곰에게 습격당한 계기는 휴 앞으로 새끼곰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위협을 느낀 어미곰은 휴를 공격해 반쯤 죽였다. (어떻게 찍었는지 모르겠지만, 곰의 액션 장면은 미스터리할만큼 박력 있엇다.) 휴가 살아남을 수 있던 계기도 마찬가지다. 그가 생존 투쟁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아들의 원수를 직접 갚기 위해서였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인간이 극한 환경 속에서 어떤 마음을 먹고 또 행동하는지 살펴 보기 위한 대규모 실험을 벌인 것 같다. 어느 평자는 이를 '고통 포르노'라고 표현했던데, 좀 자극적이긴 하지만 완전히 틀린 표현도 아니다. 


극한의 생존 투쟁은 결국 복수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휴는 복수를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 신에게 결정을 맡긴다. 2시간 넘게 관객을 따라오게 해놓은 뒤 내리는 선택치고는 다소 기만적이다. 게다가 휴의 선택은 본디오 빌라도의 판결처럼 위선적이기도 하다. 강 건너 편에 대신 복수해줄 수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피츠제럴드는 얼마 남지 않은 머릿가죽을 인디언들에게 빼앗긴다. 


인디언 부족이 그 추장의 딸의 목숨을 구해준 휴에게 감사의 말이나 눈인사 하나 건네지 않고 무심코 스쳐지나가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눈이 내렸다가 그치고 녹고 다시 눈이 내리듯이, 고마워할 것도 미안해할 것도 없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듯이. 말 위에 올라 유유히 지나가는 모습에선 당연한 권위가 베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