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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518의 철학적 의미 <철학의 헌정>
  2. 작가가 지시한 대로 움직이기, <28> (2)




친절하신 김상봉 교수는 책의 어느 부분에 어떤 내용이 기술돼 있는지, 어떤 참고 자료를 활용해 기사를 작성하면 좋은지까지 알려주셨다!




헤겔은 프랑스 혁명의 철학적 의미를 규명하는데 학문 여정의 한 자락을 할애했다. <정신현상학> <역사철학강의>가 그 결과물이다. 주나라를 이상국가로 여긴 공자는 이를 위한 삶과 사회의 원리를 제시하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 


그러나 한국의 철학자들이 동학농민운동, 3·1 운동, 4·19 혁명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철학적으로 대응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55)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말했다. “대체 철학이 뭡니까. 플라톤, 칸트, 맑스 이야기하면 철학입니까. 자기 사회에 대한 주체적인 성찰과 비판은 왜 철학이 아닙니까?”


5·18은 한국 현대사의 주요 변곡점이며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건이지만, 지금까지 이를 규명하는 건 주로 사회학자·역사학자·문학자의 몫으로 여겨졌다. 김 교수의 신간 <철학의 헌정>(길)은 5·18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드러내려는 지난한 연구의 결실이다.


그는 5·18이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시작된 새로운 나라에 대한 동경이 오랜 저항과 항쟁의 역사 속에서 물과 불의 시련으로 정화되어 눈물의 보석으로 맺힌 사건”이라고 본다. 10일간의 항쟁공동체에서 시민들은 “역사의 고통에 응답하기 위해 죽음의 공포를 초월”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고, 아무도 조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 공동체는 국가의 부정이 아니라, 참된 국가의 지향이었다. 


김 교수의 5·18 해석은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나아간다. 5·18은 “현세적 삶의 문법으로 해명할 수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든 불교든 기존의 종교는 인간존재를 개인의 차원에서 해석한다. 김 교수의 용어로는 ‘홀로주체성’이다. 하지만 1980년 광주에서 구현된 것은 ‘서로주체성’이었다. 애초엔 시위에 무관심했던 시민들도 노인이 곤봉에 맞고, 부상자를 나르던 택시기사가 대검에 찔리고, 구경하던 학원수강생들이 구타당하자 목숨을 걸고 나섰다. 5·18은 “인간존재의 완전성이 만남에 앞서 실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만남 속에서 생성되는 것임을 제시”했다. 



사진 서성일 기자


그러나 지금 5·18의 정신을 잇는 일은 위태롭다. 광주의 비극을 조악하게 은폐한 자리에 태어난 1980년대에는 5·18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이 금지되거나 왜곡됐다. 이는 역설적으로 5·18을 드러내려는 시도 자체가 용기이자 진실일 수 있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표면적인 민주화와 5·18에 대한 복권을 거친 90년대 이후, 광주는 서서히 잊혀졌다. 심지어 극우성향 종편들은 5·18의 북한군 개입설을 선정적으로 주장하고, 극우 인터넷사이트 일베에선 5·18을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김 교수는 “민주화에 대한 존경이 끝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광풍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가속화됐습니다. 구제금융 위기때 없는 사람들이 금 모아줬더니, 그들은 정리해고로 보답했습니다. ‘자기들끼리 호의호식하면서 우리는 희생시켰다’는 정서가 이때 싹텄습니다. 이제 왜곡된 역사의식이 사회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우려하는 상황까지 왔어요.”


김 교수는 다시 지적한다. “진리가 하필이면 모욕당함으로써 자기를 증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모든 참된 존재의 비극적 숙명에 속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예수가 빛이요 진리임을 먼저 알았던 자들은 실은 그의 제자들이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었다.”  


기우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누군가에게 선물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김 교수도 “양치기 소년 노릇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까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고 덧붙였다.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감시 수위가 높아지고, 서북청년단을 자칭하는 단체가 재건됐다. 불길한 징조다. 그렇다면 양치기 소년으로 몰린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후에 연구실에서 사건을 분석하는 것보단, 사전에 현장에서 고함쳐 사건을 막는 일이 지식인의 의무일테니까.   


*약 스포일러


한국 소설을 나오자마자 읽은 것은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일지도 모른다). 정유정의 신작 <28>을 읽었다. 


그의 전작 <7년의 밤>을 읽은 적이 있다.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 소설에 대해 할 말이 있는가. 모르겠다. 전문적인 평자라면 무엇이든 말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겐 그럴만한 꺼리가 없었다. 


<28>은 그보다는 할 말이 있다. 정유정은 책 출간을 전후한 인터뷰를 통해 구제역 파동에서 작품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언급했다. 살아있는 소, 돼지 등이 중장비에 매달린 채 거대한 구덩이 속으로 던져지는 그 풍경 말이다. 실제로 <28>은 '빨간 눈'이라 불리는 인수공통전염병이 창궐한 서울 인근의 가상 소도시 화양을 배경으로 한다. 개와 사람이 동시에 걸리는 이 병은 환자를 2~3일 내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 살아있는 사람을 살처분할 수는 없지만, 개는 그렇게 한다. 병에 걸렸든 안 걸렸든, 눈에 띄는 개는 일단 잡아 거대한 구덩이에 파묻어 버린다. 공무원 대신 착검한 소총을 든 군인이 구덩이를 지키고 섰다는 점만이 다르다. 그렇게 산 채로 흙속에 묻힌 개들의 울부짖음이 한참 후까지 들렸다고 작가는 전한다. 


작가는 말하지 않았지만, <28>이 연상시키는 풍경은 하나 더 있다. 아니, 난 구제역보다 이쪽이 더 강한 창작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5.18이다. 


'빨간 눈'의 원인도, 치료 방법도 밝혀지지 않자, 정부는 화양을 봉쇄한다. 작품에는 화양 바깥의 상황이 거의 나오지 않지만, '빨간 눈'이 크게 확산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랬다면 화양을 그토록 삼엄하게 봉쇄할만한 병력조차 남아있을 수 없었을테니까. 쉽게 말해 '봉쇄'지만, 이것은 그저 너희들끼리 앓다가 죽으라는 이야기다. 다만 그 병을 바깥으로만 퍼트리지 말라는 이야기다. 화양시민들은 분개한다.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고, 시청 광장에 집결한다. 그리고 평화 시위를 통해 봉쇄선을 뚫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봉쇄중인 군경은 이렇다할 반응이 없다. 이럴 때는 무반응이 가장 무서운 거다. 


1980년 5월의 광주도 그랬을 것 같다. 군사 정권은 광주를 봉쇄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그곳의 상황은 광주 바깥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외신의 드문 보도로, 전라도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의 풍문으로 일부 실상이 전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광주 바깥의 사람들은 모르거나, 모르는 척 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총성과 흐느낌에 귀막고, 그저 자신의 살 길을 찾았다. 화양 바깥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물론 <28>은 광주의 진상을 전하려는 소설이 아니다. 광주 전후의 사회, 정치적 맥락을 알려주는 소설도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외면하는 고립된 도시, 폭력과 약탈과 강간과 죽음이 지배하는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구제역과 광주라는 이질적인 모티브는 <28>에서 서로에게 비교적 잘 녹아들었다. 


작가는 <28>을 쓰다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지리산 자락 해발 700m 암자에 틀어박혔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16km씩을 걸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장편소설을 쓰는 건 체력전이에요. 내가 힘이 세야 이야기를 장악하고 내가 만든 세계에 인물을 풀어놓고 조절할 수 있거든요. 심신이 미약하면 편한 길로 가려 해요. 산을 뚫어야 하는 데 길을 돌아가는 거죠. 힘이 없으면 캐릭터가 제멋대로 돌아다녀요.”(중앙일보 인터뷰)


<28>은 그곳에 들어온 독자를 장악하는 소설이다. 작가는 자신의 세계, 인물을 '조절'한다고 했지만, 그 세계에 발딛고 인물의 행동을 따라가는 독자 또한 작가에게 '조절'될 수밖에 없다. 아마 그런 소설을 두고 '잘 읽힌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난 작가의 그토록 강력한 장악력이 조금 불편했다. 각자의 극한 상황에 빠진 사람, 동물을 정밀하게 보여준 뒤, "생생하지 않은가. 당신이 경험하지 못한 삶, 느끼지 못한 감정 아닌가"라고 외치는 것 같다. 이런 태도로 쓰여진 글을 읽다보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작가가 등 뒤에서 지시하는 방향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이걸 그르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싫다고 중얼거릴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