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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렘브란트 구하기 <모뉴먼츠 맨>



▲ 모뉴먼츠 맨

로버트 M 에드셀·브렛 위터 지음·박중서 옮김 | 뜨인돌 | 624쪽 | 3만3000원

사진 오른쪽의 남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제7군 소속이었던 해리 에틀링어 이병이다. 그는 독일 남서부의 도시 칼스루에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12살 해리가 유대교 전통의 성년식인 미츠바를 치른 직후인 1938년 9월, 에틀링어 가족은 모든 재산을 남겨두고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그해 11월 나치는 독일 내 유대인에 대한 ‘십자군 운동’을 전개했다. 7000여개의 유대인 상점, 200여곳의 유대인 회당이 잿더미가 됐다. 해리가 미츠바를 치른 회당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사람들은 수용소로 강제이주됐다. 

해리의 집에서 네 블록 떨어진 칼스루에 박물관에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걸려 있었다. 이 걸작은 칼스루에 박물관의 자랑이었지만, 해리는 그림을 본 적이 없었다. 박물관이 1933년부터 유대인의 출입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군에 징집된 해리는 독일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우연한 기회에 MFAA라는 특수조직에 배치됐다. 해리는 MFAA 소속으로 독일의 소금 광산 하일브론에 갔다가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발견했다. 렘브란트와 해리는 그렇게 돌고 돌아 만날 운명이었다. 

이에 앞서 독일군은 ‘안전 보호’라는 명목으로 ‘자화상’을 포함해 두 사람 뒤의 수많은 나무 상자에 가득찬 회화들을 하일브론 광산에 은닉했다. MFAA 작전으로 구출된 ‘자화상’은 전후 칼스루에 박물관으로 반환됐다. 

MFAA는 2차대전 당시 연합군 소속으로, 13개국, 350여명이 모인 정예 조직이었다. 이름이 생소하고 활동이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조직의 요원들이 무언가 무시무시한 임무를 맡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Monuments, Fine Arts, and Archives section, 즉 기념물, 예술품, 그리고 기록물 전담반인 이들의 임무는 나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문화유산과 예술품을 살리는 것이었다. 이들을 쉽게 기념물 전담반, 즉 ‘모뉴먼츠 맨’이라고 불렀다. <모뉴먼츠 맨>은 그들의 활약상을 그린 논픽션이다. 

유럽에서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겨울,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미 전역의 박물관 관장들이 모여들었다. 박물관 분야에서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하버드 대학 포그 미술관 부관장 폴 색스는 그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유리 파편이 가득한 테이트 미술관, 카펫처럼 둘둘 말린 렘브란트의 ‘야간순찰’, 텅 빈 루브르 대전시실의 슬라이드 사진이 지나갔다. 색스는 “박물관과 미술관은 평화 시에도 지역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전시에는 그 존재가 두 배로 중요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 때는 하찮고 사소한 것은 떨어져 나가고 궁극적이며 지속적인 가치만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연설했다. 서양 미술 역사의 격변기를 헤쳐나갈 ‘특수 기술자’를 군에 보내자는 아이디어가 박물관장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마침 적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노동계급 출신의 박물관 직원 조지 스타우트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겉멋에 취한 부자들’을 위한 ‘종이인형 놀이’를 하는 데 진력이 나있었다. 그는 해군에 입대했다. 짧은 역사의 미국보다는 긴 역사의 영국이 전쟁 시 유물 보호에 적극적이었다. 영국이 세계 최초의 최전선 기념물 보호 프로그램을 계획하자, 미국도 움직였다. 군에 있던 스타우트 같은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1943년 MFAA가 조직됐다. 유럽 북부 원정을 눈앞에 둔 연합 원정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은 “전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역사적 기념물과 문화 중심지를 맞닥트릴 텐데 그것들을 보존하기 위해 우리가 싸우는 것”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미세한 차이로 갈리는 전쟁터에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유물을 지키라고 강요하기는 어려웠다. 미술 전문가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총을 쏘지 말라고 말리는 모습을 달가워할 군인은 많지 않았다. 독일군이 고대 유적지에 숨어 발포를 하면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기념물 전담반은 그렇게 위태롭게 출발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 철벽같던 방어선이 뚫리자 독일군은 맥없이 후퇴했다. 아돌프 히틀러와 2인자 헤르만 괴링은 점령지의 미술품을 긁어모아 한 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젊은 시절 화가 겸 건축가를 꿈꾸었다. 그는 빈 미술학교에 지원했다가 탈락하기도 했는데, 심사위원이 모두 유대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독일 총통이 된 히틀러는 어린 시절 살았던 오스트리아 린츠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 눈부신 미술관을 짓겠다고 결심했다. 전시할 작품은 물론 곳곳에서 ‘가져올’ 계획이었다. 독일 미술학자들은 유럽의 여러 나라를 돌며 미술품 목록을 작성했고, 나치 친위대는 일단 유대인의 소장품부터 몰수했다. 히틀러는 1500년 이후 독일에서 반출된 모든 작품,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혈통 예술가들의 모든 작품, 독일에서 위탁하거나 완성된 모든 작품, 독일적인 양식으로 간주되는 모든 작품은 ‘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련군의 포성이 차츰 가까워지고 있을 때, 베를린 지하 벙커에 은신한 히틀러는 결국 건설하지 못한 린츠 미술관의 축소모형을 보고 있었다. 

히틀러가 독일 민족의 영광을 위해 미술품을 모았다면, 괴링은 개인의 탐욕을 위해 그랬다. 괴링은 작품의 시대나 양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질보다 양이었다. 괴링은 훗날 뉘른베르크에서 전범 재판을 받으면서 “내 약점 중 하나는 사치품에 둘러싸이기를 좋아한다는 것과 워낙 예술적 기질이 높아 걸작품을 감상함으로써 살아 있고 불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괴링은 기차로 이동할 때 미술품을 보관하는 화차를 한 량 더 연결했다. 괴링은 스스로를 ‘르네상스적 인간’으로 여겼지만, 남들이 보기엔 ‘촌스럽고 탐욕스러운 바보’였다.

죄드폼 박물관에서 마티스의 작품을 보고 있는 괴링

프랑스, 벨기에 등 독일 점령지의 유산을 보호하기는 상대적으로 쉬웠다. ‘문명을 보호한다’는 거창한 명분은 군인들의 자부심을 충족시켰다. 그러나 연합군이 독일로 진격한 뒤로는 양상이 달라졌다. 병사들은 적군은 물론 적의 유산에 대해서도 자비심을 품지 않았다. 대성당들은 필요 이상의 대폭격에 속절없이 노출됐다. 하지만 기념물 전담반이 보기엔 독일의 예술품도 인류의 자산이었다. 그것들은 “지구상에서 없애기엔 너무나 우아”했다. 

기념물 전담반은 사라진 예술품을 찾아 동분서주했다. 미켈란젤로의 ‘성모자’, 얀 베르메르의 ‘천문학자’, 얀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 등이 종적을 감춘 뒤였다. 숨은 영웅들이 기념물 전담반을 도왔다. 파리 죄드폼 박물관의 임시 관리인 로즈 발랑은 그 사례다. 그녀는 죄드폼을 찾은 나치의 비위를 맞추면서 4년간 일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부역자’로 몰릴 만한 행동이었다. 발랑은 나치가 미술품을 가져갈 때마다 화가와 출처를 적었고, 서류를 몰래 복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작성한 리스트는 훗날 작품들을 원래 자리에 가져다놓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공중 폭격을 견딜 만큼 깊은 땅속에 자리한 동시, 습도와 기온이 일정한 소금 광산은 미술품을 보관하기 좋은 장소였다. 오스트리아 알타우세 광산에는 1944년 5월부터 1년간 히틀러가 보낸 1687점의 회화가 이송됐다. 수천 개의 상자 가운데는 500㎏짜리 폭탄이 든 상자도 끼어있었다. 히틀러는 적에게 작품을 넘겨줄 바엔 폭파시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히틀러의 계획은 미술품이 아니라 광산을 지키려 한 광부들, 그리고 ‘합리적’인 독일 군인들에 의해 저지됐다. 연합군이 독일 남부에서 발견한 미술품 보관소는 알타우세를 포함해 1000개 이상이었다. 회화, 교회 종, 스테인드글라스, 필사본, 보석 등 종류도 다양했다. 분류 목록을 작성해 원래 소유주가 있는 국가로 돌려보내는 데만 6년이 걸렸다. 

기념물 전담반 로널드 밸푸어는 “우리는 인류가 그토록 오랜 시간과 관심, 기술을 발휘해 만들어낸 것들을 불필요하게 파괴하고 싶지 않았다.…만약 이것들이 사라지거나 깨지거나 파괴될 경우, 우리는 그 지식 가운데 귀중한 부분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 어떤 시대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설령 적의 것이라 하더라도, 위대한 것은 위대하다. 

옮긴이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한 젊은 국군 장교의 이야기를 전한다. 1951년 겨울 강원도 동해안을 따라 진격하던 국군 제11사단 제9연대 병사들은 설악산 신흥사에 진을 친 뒤 여기저기서 들고온 판자를 쪼개 불을 피웠다. 뒤늦게 도착한 젊은 장교도 몸을 녹이기 위해 모닥불로 다가섰다. 그러나 땔감으로 쓰이고 있는 나무가 불경 목판이었음을 안 장교는 상관에게 서둘러 달려가 불을 끄고 경판을 회수하자고 말했다. 그는 훗날 “전쟁이 끝나면 언젠가는 다시 한겨레로서 함께 소유하고 함께 향유해야 할, 그리고 다시 후손에 넘겨주어야 할 겨레의 재물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썼다. 그렇게 회수된 목판은 한자, 한글, 산스크리트어 대역으로 이루어진 세계적으로 희귀한 문화재였으며, 젊은 장교의 이름은 훗날 언론인으로 이름을 날린 리영희였다.

2차대전을 다룬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텔레비전 시리즈 <밴드 오브 브러더스>를 보듯이 등장 인물의 개성과 인간미가 살아있게 서술됐다. 두껍지만 읽기 쉽다. 철저히 연합군의 시선에서 쓰여졌다는 점은 감안해야겠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에서 미술품들을 찾아온 연합군 병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