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에 해당되는 글 2건

  1. 무서운 아저씨 온다!
  2. <프로이트의 환자들>

아이는 가끔 떼를 쓴다. 이유가 없어 보이고 들어주기도 힘든 떼다. 그럴 때 부모들이 자주 쓰는 방법이 있다. "무서운 아저씨 온다!" 요즘 우리 아이도 이 말을 가끔 듣기 시작하는데, 난 솔직히 이 방식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며칠전 날씨가 좋아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한성백제문화제에 갔다. 백제 군인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음식 장터가 열리고, 아이들을 위한 캐릭터쇼가 벌어졌다. 딱 지자체가 주최하는 지역 주민용 행사였으나, 아이는 그것마저도 신난 모양이었다. 하긴 집에 가봐야 매일 보는 장난감과 책 뿐이었으니까. "집에 가자"고 하자 아이는 "집에 안가"하고 찡그렸다. 주차장에 갈 때까지 내 그 소리였다. 


참다 못한 아내가 차 안에서 그 말을 꺼냈다. "무서운 아저씨 온다!" 아이는 금세 얼굴색을 바꾸었다. "무서운 아저씨 어딨어요?" 아내는 아이가 말을 잘 들어서 다른데로 갔다고 말했다. 몇 분 후 아이는 다시 물었다. "무서운 아저씨 어딨어요?" 아내는 같은 답을 반복했다. 아이는 5분전 자신이 집에 가기 싫어 징징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 속마음까지야 알 수 없지만, 그리 놀라거나 무서운 표정은 아니었다. 차라리 '무서운 아저씨'란 사람들이 있기나 한 것인지, 있다면 어떻게 생긴 것인지 궁금해하는 표정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상상 속의 '무서운 아저씨' 덕분에 귀가길은 편했다. 


아이는 '무서운 아저씨'가 있기에 아무데서나 떼를 써서는 안된다는 걸 알아가고 있다. '무서운 아저씨'가 있기에 잠을 자기 싫다고 억지를 쓰면 안되고, 아파트에서 뛰어선 안되고, 아이스크림을 2개씩 먹자고 졸라도 안된다는 걸 알아간다. 솟구치는 욕구에 마냥 응답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렇게 해서는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간다. '초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이라든가,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초자아는 필요하다. 몇 해 전 어느 예능 토크쇼에서 유명한 가수를 본 적이 있다. 불혹이 넘은 나이였는데 초자아가 거의 형성되지 않았거나 너무나 약한 사람 같아 보여서 깜짝 놀랐다. 1시간이 채 안되는 토크쇼에서의 말로 한 사람을 온전히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측근도, 가족도, 심지어 팬도 아니기에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알 바 아니다. 그가 아이처럼 군다고 내가 피해를 입을 일도 없다. 게다가 예술가는 저 깊숙한 곳에 도사린 이드의 목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할 때가 있는 족속들이다. 피카소나 파스빈더나 피츠제럴드가 엄격한 생활 태도, 위엄있는 인격으로 사랑받은 것은 아니다. 초자아가 있건 없건, 좋은 작품만 만들어달라. 그것이 멀찌감치서 예술가들을 바라보는 나의 바람이다. 그 가수의 문제는 그의 음악이 더이상 들을만하지 않다는데 있을 뿐이다. 


'무서운 아저씨'를 자주 호출하는 건 좋지 않겠지만, 아무튼 아이가 적당한 힘을 가진 초자아를 형성했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만큼은 성숙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더 중요한게 있다. 너무 주눅들지 말기. 남이 원하는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기. 그리고 때론 초자아를 속이거나 어르거나 협상하는, 그렇게 꾀많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이 사람들은 위의 글과 조금 관련 있음.








이 이미지를 구글에서 찾다가 느낀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인 루시안 프로이트도 상당히 성공했다. '프로이트'로만 검색하니 할아버지의 이미지만큼 손자의 그림도 많이 나왔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은, 만일 죽는 날까지 정식으로 배울 기회는 생기지 않더라도, 그저 오래도록 관련 서적을 보면서 홀로 살펴보고픈 마음이 있다. 프로이트의 방대한 저서들에 등장한 150가지 사례를 통해 정신분석의 개요와 방법을 쉽게 서술한 <프로이트의 환자들>은 유익했다.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의 성에 대한 해석 방식 때문에 그와 불화했다. 융이 대표적이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 융은 리비도 이론에 대한 프로이트의 집착을 '제발 교회에 나가자고 성화를 부리는 엄마'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래서 융은 프로이트를 떠났다.

허나 꿈에서 길쭉한 무언가를 본다면 그건 남성 성기의 상징이라는 식의 즉물적인 해석은 프로이트를 오해하게 한다. 물론 프로이트가 그런 식의 해석을 한 건 사실이지만, 이건 아무래도 보통 사람의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환자들>의 저자 김서영은 그럴 때 이렇게 권유한다. "믿기지 않으면 넘어가라"


아주 좋은 방법이다. 프로이트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의 방대한 말들을 모두 금과옥조로 여길 필요는 없는 일. 프로이트의 이론은 물론 임상에서 탄생했지만, 내가 의사도 아닌 마당에 그의 이론을 임상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그의 말들을 과학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에 둔다면 신세계가 펼쳐진다.

'억압된 것의 귀환'은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에 놓인 키워드다. 억압된 것들은 농담이든 꿈이든 말실수든, 원래의 형태가 아니라면 왜곡된 형태로라도 돌아온다. 우주 속 사건 혹은 감정은 총량 보존의 법칙을 따른다고 바꿔 말해도 좋을까. 무의식은 아무 것도 잊지 않는다. 매력적인 믿음이다. 

프로이트가 비평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는 프로이트가 환자의 왜곡된 말, 혹은 아예 말하지 않은 것을 해석하고 찾아내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창작자가 보여준 것을 정직하게 분석하는 것도 비평가의 역할이지만, 창작자가 보여주지 않은 것과 보여주지 않은 이유 혹은 잘못 보여준 것을 찾아내는 것이 한 수 높은 비평가의 역할이다. 

프로이트 후기의 이드, 자아, 초자아,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도 매우 유익한 개념이다. 기억 속에서 완벽한 것으로 가정되는 상상계, 어머니와 아이의 이자관계가 폐쇄적으로 만드는 그 공간. 아이가 젖을 떼고 아버지의 법, 언어로 만든 우주로 접어드는 상징계, 이를 위한 거세. 주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편입될 때 남겨지는 어떤 것인 실재계, 꿈의 배꼽, 해석에 저항하는 잉여. 

잊어버리지 않도록 단단히 기억해둘만한 시스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