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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혁명의 열망과 뒤끝, <적군파>

적군파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임정은 옮김/교양인/388쪽/1만6000원


언젠가 일본 여행 중 우연히 경찰서 앞을 지나던 중 빛바랜 지명수배자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흑백 사진 속 인물들은 수십 년 전 유행했을 법한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을 한 채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이미 체포된 듯 스티커로 얼굴이 가려졌다. 지명수배자들은 모두 일본적군 소속이었다. 한때 이 포스터는 일본의 국제 공항 내 모든 출입국 관리소에 붙어있었다고 한다. 


적군파는 이제 역사 혹은 좌파 운동에 관심있는 이들이나 기억하는 이름이 됐다. 지명수배자들은 체포돼 형을 살고 있거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거나, 죽었다.  


<적군파>는 일본 급진 좌파 운동을 오랜 기간 연구한 미국의 사회학자 퍼트리샤 스테인호프가 쓴 책이다. 1972년 이스라엘의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의 주역 오카모토 고조를 면회한데서 시작해 20여년에 걸쳐 인터뷰, 현지 조사 등을 병행했다. 


저자는 적군파가 관련된 사건 중 굵직한 세 가지를 다룬다. 첫번째는 1972년 5월 31일 벌어진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이다.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 소속의 일본 청년 세 명이 공항에서 찾은 짐에서 소총과 수류탄을 꺼내 승객들에게 난사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26명이 죽고 80명이 다쳤다. 두번째 사건과 세 번째 시건은 시간적·인과적으로 연결돼 있다. 연합적군 숙청사건은 71년 12월~72년 2월 군마현 하루나산에 만든 비밀 기지에서 군사 훈련을 하던 연합적군(적군파와 혁명좌파의 연합조직) 조직원 사이에 벌어진 폭행, 고문을 말한다. 당시 평균 나이 23세의 조직원들 31명이 모여 있었는데, 그 중 12명이 동료에게 맞거나 칼에 찔려 죽었다. 살아남은 조직원들 중 5명은 경찰에 쫓기다가 인근 아사마 산장에서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붙잡고 수천 명의 경찰과 10일간 대치했다. 이 기간 중 민간인 1명, 경찰 2명이 사망했고, 농성하던 조직원들은 전원 체포됐다. 


스테인호프는 60년대에 청년기를 보냈다.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움직임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당시 청년들이 들썩인 것은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서유럽, 남미, 중국, 일본의 젊은이들이 구체제를 뒤엎고 새 세상을 열기 위해 일어났다. 베트남전쟁, 관료제, 식민주의, 인종차별, 여성해방, 언론자유 등 온갖 것들이 이슈였다. 스테인호프는 열정적인 참여자는 아니었지만 호의적인 관찰자로서 그 시기를 보냈다. 


연구자의 길을 걸은 스테인호프는 미국 바깥의 상황이 궁금했다. 특히 일본과 미국의 진보 운동은 비슷한 듯 하지만 달랐다. 미국에선 아무리 뜨거운 운동이었다해도 국가 체제 자체에 맞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규모 가두 시위는 드물었고, 대개 비폭력주의를 천명했다. 그러나 일본의 젊은이들은 달랐다. 일본의 일부 좌파 진영에선 국가를 전복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선 무장 투쟁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들은 국내 상황만 보지 않았다. ‘세계동시혁명’으로 낡은 자본주의 체제, 국가주의를 타파할 꿈도 꾸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오카모토 고조는 화목한 가정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중산층 청년이었다. 미국에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있으면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한다거나 나쁜 성장 환경에서 원인을 찾는 경우가 있는데, 오카모도는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텔아비브 공항에서 무고한 승객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았을 때도 그의 정신은 멀쩡했다. 이는 어제의 동지를 오늘 고문해 죽인 연합적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굳건한 신념으로 벌인 범죄들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는 오카모토 고조


오카모토는 범행 당시 24세였다. 그는 면회온 스테인호프에게 적군파 이론의 개요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견고한 부르주아 권력을 분쇄하길 원하며, 이를 위해선 무장 투쟁을 통한 전세계 동시혁명이 필수적이다. 난민 구제나 평화 행진 같은 것은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일종의 ‘마스터베이션’이라고 오카모도는 표현했다. 혁명은 역사의 필연이며, 그 와중에 폭력은 불가피하다. 적군파는 혁명에 대비해 병사를 훈련시켜왔고, 자신은 그 병사 중 하나라는 논지였다. 


그러나 공항에서 죽은 것은 이스라엘 관료도, 미국의 무기상도 아니다. 성지 순례 여행을 온 외국인 참배객이 대다수였다. 오카모토는 이스라엘이 ‘교전 지대’이기 때문에, 그곳에 온 사람은 자신의 목숨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혁명은 ‘전체적인 것’이다. 적, 죄없는 자, 방관자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은 채 모두 혁명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오카모토에게 사람은 저마다의 삶, 감정, 생각을 가진 개체가 아니라 혁명이라는 거대한 목적에 필요한 희생자였다. 자신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부르주아 국가의 법정은 판단할 수 없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고 카스트로는 말한 적이 있다.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은 당시 전세계 텔레비전을 통해 알려졌다. 테러의 목적이 폭력 자체보다는 폭력을 널리 알리는데 있다고 한다면, 오카모토는 일단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살피면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 적군파는 세계혁명을 위해 일본과는 아무 상관 없는 팔레스타인의 편에 섰지만, 정작 PFLP는 세계혁명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가망 없는 목적을 위해 충격적인 행동으로 자기 삶을 희생”한다는 점에서 오카모토는 이념적으로 정반대인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오카모토는 13년간의 독방 수감생활 끝에 PFLP에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 군인과 교환되는 조건으로 석방됐다. 함께 해방된 팔레스타인 포로들에 의해 무등 태워진 오카모토는 멍한 표정으로 리비아에 도착했다. 일본 정부는 오카모토가 귀국하면 즉시 체포하겠다고 했고, 그는 남아있는 일본적군과 함께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 그 사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고, 오카모토가 속한 일본적군 리더 시게노부 후사코는 귀국한 뒤 체포됐다. 시게노부는 옥중에서 일본적군 해산을 공식 선언한 뒤, 무장투쟁 노선이 오류였음을 인정했다. 


(참조 : 한겨레21 시게노부 후사코 인터뷰)

'테러의 여왕' 시게노부 후사코와 그의 딸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이 팔레스타인 독립 투쟁사의 이채로운 에피소드였다면, 연합적군 숙청사건은 일본의 학생운동, 급진좌파운동에 궤멸적 타격을 입힌 계기가 됐다. 사실 아사마 산장 농성은 텔레비전을 통해 시시각각 알려졌고, 마지막날 공방전은 95%에 달하는 시청률을 보였다. 그리고 화면을 지켜보던 청년들은 오랜 도피로 지친 5명의 청년들이 수천 명의 경찰에 맞서는 모습을 내심 응원했다. 도쿄대, 교토대 등에서 열린 집회에서 이들을 응원하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아무런 사적 이득도 없이, 오직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는 청년들의 모습은 체 게바라 같은 반체제적 영웅상과 겹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사마 산장 사건이 벌어진 일주일 후, 경찰이 비밀 기지 근처에 묻힌 연합적군 멤버들의 시신을 발견하면서 여론은 급반전했다. 동상이 걸리고 심하게 맞고 칼에 찔리고 목이 졸린 시신이 하나 둘씩 나오자, 내심 적군파를 지지하던 청년들은 ‘이해불능’의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후 일본에서 좌파 운동을 지지하는 분위기는 완연히 수그러들었다. 


연합적군은 적군파와 혁명좌파의 연합조직이었다. 적군파는 세계동시혁명을 주창했고, 혁명좌파는 일본 국내 정치 상황에 초점을 맞췄다. 적군파는 몇 차례의 은행 습격으로 얻은 돈이 있었고, 혁명좌파는 총포 가게 습격으로 총기와 탄약을 보유했다. 두 조직의 공통점은 혁명적 변혁을 위해선 무장 투쟁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와카마스 코지의 <실록연합적군>(2007)의 스틸들. 아래는 아마 '총괄'하는 모습인 듯


수직적 위계질서가 강하게 잡힌 동양 사회에서 두 조직이 통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극좌 무장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적군파와 혁명좌파는 무장투쟁이라는 대의를 위해 통합했지만, 외부의 ‘적’과 싸우기 앞서 내부의 사상 투쟁에 승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두 조직의 수장들은 자신의 휘하 조직원들이 사상적으로 더욱 강하게 무장된 것처럼 비춰지기를 원했다. 혁명좌파의 리더인 나가타 히로코는 적군파의 도야마 미에코의 태도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회합을 하면서 머리를 빗었다거나, 산에 들어오면서 이름도 머리 모양도 바꾸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혁명가가 아닌 여자로 비춰지기를 원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적군파 리더 모리 쓰네오는 나가타의 지적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론가였던 그는 혁명을 위한 ‘내면적 준비’가 필요하다며, 이를 ‘공산주의화’ 혹은 ‘총괄’이라는 말로 불렀다. 자신이 보기에 문제가 있는 조직원들에게는 “총괄하라”거나 “공산주의화가 덜 됐다”는 식으로 지적을 했는데, 문제는 ‘공산주의화’와 ‘총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모호했다는 점이다. 


고행, 신체 단련을 정신적 성숙과 동일시하는 문화는 일본을 비롯한 동양에 널리 퍼져있다. 모리는 이것을 받아들였다. 예전에 경찰에 체포됐을 때 신문 도중 잡담을 한 조직원, 이 사실을 바로 지도부에 보고하지 않은 조직원 등이 ‘총괄’을 명령받았다. 둘은 처음엔 책상에 마주앉아 죄과를 기록해야 했고, 이후엔 구타당했다. 모리는 구타가 잘못된 행위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과 대결함으로써 약점을 극복하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구타 당해 실신한 조직원들은 기둥에 묶인 채 방치됐고, 이후엔 눈이 내리는 바깥으로 내쫓겼다. 구타에 가담한 조직원들은 꺼림칙함을 느끼면서도, 만약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자신도 ‘총괄’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범행에 가담했다. 지도부의 눈에 사소한 흠결을 보였다는 이유로 조직원들은 하나 둘씩 ‘총괄’ 대상이 됐고, 그렇게 죽어갔다. 그리고 이들의 죽음은 ‘패배사’(敗北死)로 규정됐다. 동료들에 의한 타살이 아니라, 공산주의화를 이룩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죽었다고 합리화한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나 산 속으로 쫓긴 연합적군 조직원들은 두려움과 독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기서 멈추면 혁명은 이룰 수 없다. 총을 잘 쏘는 것 만큼 정신적으로 단련돼 있지 않으면 안된다. 저기 묶인 녀석은 왜 내가 폭력을 휘두르지 않아도 되도록 올바른 태도를 갖추지 않는가. 소규모 조직원 개개인의 이데올로기와 외부 현실이 불일치할 때, 조직원은 외부 현실에 새로운 해석을 가해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막는다. 


적군파 탄생에는 시대적 맥락이 있다. 60년대의 일본 청년들은 뭉쳐서 항의했으나, 현실은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청년들은 헬멧과 죽창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혁명‘당’이 아니라 혁명‘군’이 됨으로써 무장봉기를 꿈꾸었다. 군사 훈련, 총기 탈취, 부르주아 은행 습격을 통한 혁명 자금 모금 등에는 어딘가 낭만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시민들은 이들에게 차츰 부정적 인상을 갖기 시작했으나, 적군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 관념 속의 혁명은 장삼이사의 삶보다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힘겹게 투쟁한 약자의 패배는 대체로 고결한 인상을 준다. 이상과 몽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년들을 사회는 격려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연합적군 숙청사건을 본 뒤에도 그런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꿈많고 열정적이고 순수했던 젊은이들이 어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가. 세상을 더 좋게 만들려 했는데, 왜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는가.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내가 그곳에 있었더라면’이라는 상상이다. 연합적군을 ‘나’와 다른 일부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는 것은 안일한 해석이다. 쉬운 길을 거부할 때에만 우리는 앞으로 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