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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느 지식인의 회상, <20세기를 생각한다>





<20세기를 생각한다>는 쉽지 않은 책이었다. 20세기의 혁명, 반혁명, 전쟁, 정치인, 지식인에 대한 매우 세밀한 논평이 담겨 있기 떄문이다. 독서에는 당시 상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래도 이런 책은 척 보면 '좋은 책'이라는 확신이 든다. 







20세기를 생각한다

토니 주트·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열린책들/520쪽/2만5000원


영국 출신의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60세였던 2008년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뉴욕대 레마르크연구소의 소장이자 ‘전후 유럽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란 평가를 받은 <포스트워>의 저자로 명망을 누리던 시기였다. 21살 연하의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는 주트가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날, 그에게 공저를 제안했다. 2009년 1월 책을 위한 첫 대화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주트는 서서 스나이더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사이, 주트는 다리와 폐를 쓸 수 없게 됐다. 주트는 2010년 8월 사망했다. 


<20세기를 생각한다>는 2009년 봄부터 여름까지 주트와 스나이더가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주트는 자신의 삶과 지적 이력을 20세기 정치사의 주요한 현장들과 교차시킨다. “역사이자 전기이며 윤리학 논문”인 <20세기를 생각한다>의 흐름을 주트의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나는 1948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나의 부모는 동유럽에 뿌리를 둔 유대인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이종사촌 이름을 따서 내 이름을 지었다. 벨기에 브뤼셀에 살았으며, 아버지보다 다섯 살 어렸던 사촌 토니는 1942년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뒤 살해됐다. 나는 토니가 누구였는지, 왜 내가 그 이름을 갖게 됐는지 한참 뒤에야 알았다. 전후 영국에서 홀로코스트는 그 이름을 명확히 얻지 못한 상태였다. 마치 도처에 퍼졌으나 아직 크게 발달하지 않은 안개 같았다. 


나는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으로 양육되지는 않았다. 부모님 모두 유대인을 키우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안락한 삶을 꾸린 우리 가족은 종종 해외 여행을 갔다. 한번은 암스테르담에 사는 아버지의 친척을 방문한 뒤 덴마크로 가는 길이었다. 이를 위해선 독일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독일에 머무는 일이 없도록 네덜란드에서 휘발유를 최대한 넣었다. 하지만 고속도로가 없던 시절이라 모두 지쳤고, 그날밤엔 어쩔 수 없이 독일의 시골 호텔에 묵어야 했다. 아버지는 열두 살인 내게 프런트와의 모든 의사소통을 맡겼다. 나의 유년기 세계는 히틀러가 남겨준 세계였다. 파시즘의 근대주의적 면모는 외국인들에게 인기였다. 파시즘은 젊었고 과감했고 활력이 넘쳤다. 찬미자들에게 파시즘은 과거를 동경하고 따분하고 쓸쓸한 영국이 놓쳤던 모든 것이었다. 


나는 10대 내내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었다. 열다섯 살 무렵엔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를 읽었다. 조지 오웰의 평론과 소설을 탐독했고, 아서 케스틀러의 <한낮의 어둠>에 담긴 공산주의자에 대한 환멸도 느꼈다. 나는 1968년 파리에서 학생 시위대에 휩쓸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사회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로 자랐기 때문에, 학생이 하나의 혁명 계급일 수 있다는 프랑스적 관념을 본능적으로 의심했다. 


1960년대 중반, 나는 이스라엘의 키부츠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일하곤 했다. 나는 키부츠를 사랑했다. 바나나를 따고 강건함을 즐겼으며 시골을 탐험하고 여학생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노동자 시오니즘의 본질은 디아스포라에서 돌아온 유대인 젊은이들이 나약한 삶에서 구원돼 팔레스타인 시골의 외딴 정착지로 이주할 것이라는 관념에 있다. 그곳에서 이들은 착취하지도 당하지도 않는 유대인 농민이 될 것이다. 나는 1967년 봄, 6일 전쟁 직후 이스라엘군에 자원군으로 입대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나는 이스라엘이 평화를 사랑하는 유대인 농민의 사회민주주의적 천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만난 초급 장교들은 키부츠가 아니라 도시 출신이었다, 현실의 이스라엘은 이웃을 멸시하는 중동의 한 나라였다. 그들은 이웃의 땅을 공격하고 점령해 그들과 한 세대에 걸친 파멸적 불화를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1970년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의 특별연구원 자격으로 나는 1920년대 프랑스 사회주의에 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했다. 고등사범학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과잉 교육을 받아 자만심은 부풀고 가슴은 위축된 젊은 프랑스인들로 넘쳤다. 당시 사회주의는 역사적 주제로서는 죽은 것 같았다. 당시 프랑스 사회당은 선거에서 참패해 몰락한 뒤 기회주의적인 프랑수아 미테랑에 의해 재건됐다. 하지만 이미 새로운 이름을 지녔으되 옛 정신은 빼앗긴 영혼 없는 선거용 조직에 불과했다. 



토니 주트와 20세기의 사건들/ 열린책들 제공



소련의 기획을 비판하면서 극좌파로 남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루카치, 골드망, 그람시 같은 이른바 ‘서구 마르크스주의자’의 길이다. 이들은 패배자지만 적어도 결백했다. 또다른 기획은 중국, 중남미, 아프리카, 둥남아에서 진행되던 농촌 혁명이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지식인 계급을 점진적으로 파괴했다. 즉 소매였다. 반면 마오는 도매로 살해했고, 폴 포트는 모조리 파괴했다. 1989년 12월 나는 빈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권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는 동구권 공산주의의 몰락을 가져온 사건 중 가장 마지막이자 폭력적인 드라마였다. 


1987년엔 뉴욕대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뉴욕에 가기 전까지 나는 케임브리지, 버클리, 옥스퍼드라는 고립된 상아탑에서 성년의 삶을 보냈다. 하지만 뉴욕의 대학교들은 그 도시와 분리될 수 없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대화는 대학 안에서 이뤄지지 않고, 도시 전역에서 교수, 기자, 작가, 예술가, 방문객의 참여로 이루어진다. 


2001년 9월 11일의 사건 때문에 나는 미국의 공적인 일에 더 깊이 논쟁적으로 관여했다. 분명하게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내게 공민의 의무 자체였다. 프랑스어에는 몽테뉴부터 카뮈까지 자국의 위대한 몇몇 작가들에게 붙이는 ‘모랄리스트’라는 단어가 있다. 프랑스의 모랄리스트들은 소설을 쓰든 철학이나 역사를 하든 작품 속에서 명백한 윤리적 참여를 이야기한다. 나는 미국인 모랄리스트였다. 


준거틀이 클수록 세세한 내용과 지역적 지식에 대한 이해력은 빈약해진다. ‘세계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현장 지식을 유지할 수는 없다. ‘세계적인 지식인’ 같은 것도 없으며, 같은 이유로 나는 ‘세계 체제론’ 따위에도 회의적이다. 지식인은 원래 주기적으로 일반 명제의 수준에 도달하려는 기질을 타고난 자들이다. 중요한 것은 중간 지점, 즉 지역적 세밀함과 세계적 일반 원리 사이의 공간이며, 이 공간은 오늘날에도 국가 차원에서 결정되기 쉽다. 상품은 자유롭게 이동하고 화폐는 빛의 속도로 유통되지만, 인간은 국가의 틀 속에서 산다. 


지적 활동은 이성을 유혹하는 것과 비슷하다. 목적을 위해 곧바로 달려가면 실패할 것이 확실하다. 세계사적 논쟁에 기여하기를 원한다면 처음부터 세계사적 논쟁에 기여하지 말라. 세계사적 반향을 일으킬 일들에 관해 말하되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준에서 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