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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배우가 창조하는 마법의 순간, <맨 오브 라만차>





내가 개막한 지 두 달도 더 된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를 보러 간 건 버스 정류장을 지나다 본 아래 포스터 때문이다. 난 젊은 조승우와 늙은 조승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사실 이 포스터는 티저 포스터다. 그러니까 이런 모습이 공연에 나오진 않는다는 뜻이다. 조승우의 젊음과 늙음은 종교재판을 앞두고 지하감옥에 수감된 작가이자 젊은 관료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 그가 감옥 속에서 연기하는 늙은 기사 돈키호테로 표현된다. 세르반테스는 실제로 작가라기보다는 군인, 관료로 더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해적에 붙잡혔다가 몸값을 내고 풀려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포스터의 비밀이 궁금해 뮤지컬을 봤다면 살짝 '낚였다'는 기분이 들 수도 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론 기분 좋은 '낚임'이 됐다.  


<맨 오브 라만차>의 주제는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이상과 현실의 충돌, 잃어버린 꿈에 대한 그리움 등이다. 이런 주제는 너무나 흔해 자칫 유치해 보이기 쉽다. 하지만 뮤지컬은 졷종 뻔하고 유치한 주제를 그럴싸하게 전달하는데 효과적인 장르다. 공연장에서 받은 느낌은 벅찬데, 그걸 말로 표현하면 앙상해진다. 그래서 뮤지컬을 말로 풀다보면 가끔 '내가 본게 그 정도였나' 하고 머쓱해지기도 한다. 


역시 뮤지컬은 공연장에서의 느낌을 믿고 가는 수밖에 없다. 이 느낌이란 것은 주로 노래에 담겨 전달된다. <맨 오브 라만차>의 주제는 인기곡 '이룰 수 없는 꿈'의 가사에 모두 담겨있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역시 가사만 써놓고 보니 단순하다. 하지만 웅대한 시대착오와 유쾌한 정신착란에 빠진 돈키호테가 열창하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확실히 뭔가 울컥하다. 뮤지컬은 그런 울컥함에 빠지기 위해 보는 것 같다. 


돈키호테가 거울의 기사들과 싸우다가 패배하는 종반부 장면은 작심하고 만든 하이라이트다. 다른 조명을 배제하고, 거울에 반사되는 조명만으로 돈키호테를 공격하는 대목은 탁월했다. 조도를 낮추자 다섯 개의 거울에는 돈키호테의 늙고 초라한 모습이 드러난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고 무릎을 꿇는다. 행복한 정신병자를 의사가 치료해 다시 불행으로 몰아넣는다는 이야기는 이청준의 단편 <조만득씨>와 이를 토대로 한 현빈 주연의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에도 나온다. 따져보면 세상에 새로운 주제는 없으므로, 관건은 디테일과 형식이다. <맨 오브 라만차>는 그런 면에서 성공적이다. 






내가 본 공연은 조승우(세르반테스/돈키호테), 린아(알돈자) 출연 회차였다. 조승우는 명성대로 잘했다. 배역은 물론 관객의 반응까지 확실히 장악해 '여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는 몸을 떨면서 "배우 기계같다"고까지 감탄했는데, 난 그 정도인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훌륭한 배우였다. 특히 초반부, 관객을 등지고 선 채 세르반테스에서 돈키호테로 조금씩 변신하는 대목은 별다른 기계 장치나 특수효과에 의존하지 않고도 배우의 역량만으로 창조되는 마법같은 순간이었다. 산초 역의 김호영도 주목받았다. 


린아는 가창력이 좋았지만 연기가 아쉬웠다. 연기를 너무 잘 하려 하지 말고, 자기 배역에 너무 몰입하지도 말았으면 좋았겠다. 세상에 환멸을 느끼는 알돈자, 냉소하는 알돈자, 신경질내는 알돈자, 분노하는 알돈자 역에 너무 충실하다보니 관객까지 조금 지치게 했다. 실제 알돈자같은 처지였다면 그렇게 악쓰고 소리 질렀을지 모르지만, 무대 위의 알돈자가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표정과 고함 모두 20%씩 덜어내고, 좀 여유있게 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