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에 해당되는 글 2건

  1. 데이비드 밴의 악스트 인터뷰 중 발췌. 13살때 아버지가 자살한 작가의 이야기.
  2. 당신의 한 표가 사람을 죽인다.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1966년 미국 알래스카주 아다크 섬에서 태어난 작가 데이비드 밴의 인터뷰 중 발췌. 격월간 문예지 '악스트' 15호에 실림. 작가가 13살 때 아버지가 자살. 국내에는 '자살의 전설' '고트 마운틴' '아쿠아리움' 등이 출간.



"대부분의 작가는 (적어도 초기작에서는) 개인사와 가족 이야기를 끌어다 쓴다. 그 소재에는 무게와 진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 나는 학생들에게 "가족을 제단에 올려놓고 도끼를 휘두르라"라고 말한다. 나는 그리스 비극을 쓰는데, 그리스인들은 가족이 우리를 만들고 망가뜨린다는 사실을 250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현대의 치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해서 망가졌는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다시 온전해질 수 없다."


"역경은 품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일부러 역경을 선택하는 것은 피학적일 것이다. 차라리 품성을 덜 발달시키고 편하게 사는 편을 택하겠다."


"(소설의 소재를 어디서 찾는지 질문에) 나도 알았으면 좋겠다. 소재를 찾을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저절로 떠오르거나 안 떠오르거나 둘 중 하나다."


"미국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며 바보들의 나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편집자, 발행인, 에이전트, 서평가, 사서 등 문학을 홍보하는게 일인 사람들조차 새로운 문학 작품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미국에서 출간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그저 행운을 빈다. 번역 시장도 민망한 수준이다. 미국인들은 바깥 세상에 관심이 없으며 다른 나라의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


"비극에 엄청난 힘이 있다는 말은 옳다. 어느 정도는 고통이 우리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관점을 바꾸는데, 관점이야말로 문학의 핵심이다. 경험을 통해 인물의 관점이 어떻게 바뀌느냐가 문학의 본질이다."


"글쓰기를 위해 무엇이든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으며 다른 무엇도 글쓰기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누이에게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당신과 엄마, 내 아내를 사랑하지만 -당시는 이혼하기 전이었다- 글쓰기를 더 좋아하며 나 자신보다 글쓰기가 더 좋다고 말이다. 좋게 들리지는 않지만, 글쓰기는 언제나 나의 모든 것이었다. 글쓰기는 내게 종교의 대체물이 되었다."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제임스 길리건 지음·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76쪽 | 1만3000원

1966년부터 현재까지 하버드대, 뉴욕대에서 정신의학 교수로 재직해온 제임스 길리건은 폭력의 심리적 메커니즘과 그 예방책을 연구해왔다. 

20세기 미국의 살인율과 자살률 통계를 살피던 그는 이 두 가지 수치의 연관성을 발견했다. 길리건은 자살과 타살을 아울러 ‘폭력치사’라고 부르는데, 이 수치는 조사기간 동안 수차례에 걸쳐 갑작스럽고 큰 규모로 오르내렸다. 무엇이 폭력치사 수치를 오르내리게 했을까. 길리건이 얻은 결론은 상당히 놀랍고 꽤 선동적·선정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의 이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보수가 집권하면 사람이 죽는다.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는 2011년 미국에서 처음 나왔다. 책의 원제도 번역 제목과 같다. 결론에 비하면 제목이 오히려 점잖은 편이다. 길리건의 이론은 미국 공화당의 존재 이유를 부정한다. 과학자로서 부담이 따를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길리건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의학은 원래 가치 판단을 하는 일이 아니지만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의학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인간 생명이라는 가치, 혹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야 할 때”라고 말한다.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추구하는 정책은 죽음을 불러오므로 그들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공화당이 집권하면 죽음의 전염병이 퍼진다’는 걸까. 길리건은 1900년부터 통계가 나온 2007년까지 미국 정부가 작성한 살인율과 자살률의 증감을 조사했다. 1900년에는 자살과 살인을 합해 10만명당 15.6명이 죽었다. 폭력치사 발생률은 이후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더니 1908~11년에는 22.6명에 이른다. 폭력치사가 10만명당 1명 늘어난다는 것은 현재 3억명에 육박하는 미국 인구 중 3000명이 더 죽는다는 뜻이다. 폭력치사 발생률은 2007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큰 폭으로 오르내렸다. 

폭력치사 발생률이 증가할 때는 공화당 출신 대통령, 줄어들 때는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집권했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대통령 당선 이후 민주당은 20년 장기 집권에 들어갔다. 존 F 케네디와 린든 존슨이 대통령으로 재임한 1960년대까지로 시야를 넓히면 민주당은 1933~68년의 36년 중 28년간 집권했다. 이 기간은 폭력치사 발생률의 가장 깊은 ‘골짜기’였다. 1969년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백악관에 입성하면서 폭력치사 발생률은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공화당의 장기 집권 시기 폭력치사 발생률은 ‘전염병 수준’이었다. 폭력치사 발생률은 1997년 빌 클린턴 집권 이후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20세기의 폭력치사 발생률의 평균값, 중간값은 각각 19.4명과 20명인데, 폭력치사 발생률이 이보다 높으면 길리건은 ‘전염병’이라는 표현을 썼다.

 가장 공화당스럽지 않았던 공화당 대통령, 아이젠하워(1890~1969)

두 번의 예외가 있다. 공화당 출신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는 폭력치사 발생률이 떨어졌고, 민주당 출신 카터 때는 올라갔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사회보장, 실업수당의 규모를 키우고 미국 역사상 최고 수준의 소득세 최고세율을 매기는 등 민주당에 가까운 공화당 대통령이었다. 반대로 카터의 경제 정책은 닉슨보다도 보수적이었다. 

“공화당 대통령과 민주당 대통령 집권기의 전반적인 폭력치사 발생률 차이는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다. 그 연관성은 역사적 격변(대공황, 2차 세계대전)과 개인적 차이(아이젠하워, 카터)를 압도할 만큼 강하다.” 이 시기 공화당 대통령 집권기를 통틀면 폭력치사 발생률의 순누적 증가분은 19.9명, 민주당 집권기는 순누적 감소분이 18.3명이었다. 오늘날의 미국 인구 수준으로 따지면 민주당 정부 때는 공화당 정부 때보다 폭력치사로 죽는 사람이 11만4600명 적다. 

공화당의 문제는 경제였다. ‘보수는 경제에 강하고 진보는 경제에 약하다’는 통념이 있다. 길리건은 구체적인 통계를 들어 이 통념을 반박한다. 20세기 이후 공화당 정부 집권기 실업률의 누적 증가분은 27.3%, 민주당의 누적 감소분은 26.5%다. 불황기를 따져도 마찬가지다. 공화당 정부의 누적 불황기는 246개월, 민주당 정부는 86개월이었다. “공화당은 지난 한 세기 내내 실업의 규모와 지속도, 경기 위축의 빈도와 깊이와 지속도, 소득과 재산의 불평등을 하나같이 높였다.” 

 검색하니 대뜸 이런 이미지부터 뜨는 닉슨(1913~1994). 올리버 스톤의 <닉슨>을 보면 좀 불쌍해지기도 함. 

길리건은 수치심의 문화에 대해 설명한다. “수치심이 폭력 행위를 낳는 데 충분하지는 않아도 꼭 필요한 병원체”라는 것이다. 성경이 기록한 인류 최초의 살인은 수치심 때문에 일어났다. 신이 형 카인의 예물을 받지 않은 대신, 동생 아벨이 바친 예물을 기쁘게 받자 카인은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동생을 죽였다. 사람들은 수치심에서 고통스러울 때 이를 남에게 전가하려고 폭력을 휘두른다. 폭력이 타인에게 향하면 살인으로, 자신에게 향하면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

실업은 수치심을 증폭시킨다. “실직처럼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호되게 안겨주는 경험도 드물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캐서린 뉴먼은 “우리는 사람들에게 돈을 건네줄 수는 있어도… 명예를 건네주지는 못한다”며 “일을 곧 도덕성으로 보는 전통이 있는 우리 사회에서 취업자와 무직자를 가르는 선이 문화의 가장 깊은 구분선이라는 것은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덧붙인다. 무직자는 수치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결국 ‘공화당 집권→실업률 증가→수치심 증폭→폭력치사 증가’라는 연쇄고리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미국 국민은 왜 자신을 불평등과 폭력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공화당에 표를 던질까. 로마 황제들은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분할 정복’을 사용했다. 이는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해 그들 모두의 진정한 적이 상류층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다. 미국 남부에선 흑백 차별을 조장함으로써 가난한 백인이 부유한 백인을 질투하는 대신 가난한 흑인에게 우월감을 느끼며 살도록 했다. 범죄를 적극적으로 줄이지 않음으로써 서민이 가난한 범죄자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했다. 그러면서 공화당은 역설적으로 ‘범죄에 대한 불관용’을 내세워 인권을 내세우는 민주당을 공격했다. 

사회학자 크리스토퍼 젠크스는 “투표일에 내리는 비처럼 범죄는 공화당에 유리하다”고 말한다. 길리건은 “공화당이 한다고 말하는 일(폭력 예방)과 공화당이 실제로 하는 일(범죄 유발)은 앞뒤가 안 맞는다”고 지적한다. 

기실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결은 ‘수치심의 윤리’와 ‘죄의식의 윤리’의 대결이었다. 수치심의 윤리에서는 수치와 굴욕이 악덕이고 자부심과 명예가 미덕이다.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죄가 악덕이고 순결이 미덕이다. 가령 기독교라는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자부심(교만)을 가장 몹쓸 죄악으로 친다. 그래서 죄의식의 윤리는 아무도 남들에게 우월감을 못 느끼도록 평등주의를 옹호하고, 수치심의 윤리는 우월한 사람이 자부심과 명예를 만끽하도록 한다. 죄의식의 윤리를 지키는 사람은 약자에게, 수치심의 윤리를 지키는 이는 강자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서유럽 현대사에서 가장 순수하고 극단적인 수치 문화는 나치 독일이 만들었다. 그들에게 폭력은 수치심을 지우는 정당한 수단이었다. 

길리건은 1977~92년 매사추세츠주 교도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폭력 예방을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는 수감자들 사이에 만연한 권위주의적 수치 문화를 평등주의 문화로 바꾸려 했다. 수감자들에게 학위를 따게 유도했고, 서로를 존중하도록 권했다. 그 결과 피살자와 자살자가 획기적으로 줄었다. 길리건은 “교도소라는 살인(과 자살)의 소우주에서 벌인 실험을 통해 알아낸 것을 사회 전반이라는 대우주로 확대 적용”하자고 제안한다. 폭력에 기대지 않고도 수치스러운 경험을 견뎌낼 힘이 되는 개인적·문화적·경제적 자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정은 어떨까.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2010년 자살률은 10만명당 31.2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1위, 세계 2위다. 한국의 자살률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등 보수, 중도 정부를 가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상승했는데, 10년간의 중도 정부 기간에는 그 상승폭이 비교적 작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자살률은 연평균 1.17명 증가, 이명박 정부 3년간의 자살률은 연평균 2.13명 증가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보다 1년 평균 482명이 더 많이 자살했다는 뜻이다. 

길리건은 “정치가 삶과 죽음을 가른다”고 말한다. 흡연이 폐암을 유발하듯이, 보수 정책은 폭력치사율을 높인다고 지적한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추천사에서 “나는 이렇게까지 정치적 결론이 명쾌한 비정치적 책을 읽은 적이 없고, 이렇게까지 사회적 함의가 분명한 정신의학서를 읽은 적이 없다”고 적었다. 2012년 한국에는 두 번의 큰 선거가 있다. ‘해로운 정치인’을 골라내는 것은 독자와 유권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