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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떻게 '양놈'들을 이길 것인가, <제국의 폐허에서>


제국의 폐허에서

판카지 미슈라 지음·이재만 옮김/책과함께/488쪽/2만5000원


35년의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지금도 그 여파로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낯선 이야기겠지만, 1905년 5월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의 소규모 함대가 러시아 주력 함대를 이겨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최종 승리를 거뒀을 때 많은 아시아인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당시 무명의 변호사였던 간디는 “일본의 승리가 사방 곳곳에 뿌리를 내려서 이제 그 열매를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고 했고, 학생 네루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고 돌이켰다. 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가던 쑨원은 그를 일본인으로 오해한 아랍인 노동자로부터 축하를 받기도 했다. 러일전쟁은 “중세 이래 처음으로 비유럽 국가가 주요 전쟁에서 유럽의 열강을 격파”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아랍, 터키, 중국, 페르시아, 베트남, 인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은 유구한 전통과 찬란한 문화를 갖고 있었음에도, 근대 이후 ‘벼락출세’를 한 서구인들에게 모욕당하고 있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말대로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이 서구 열강 러시아를 무찔렀다는 사실은 그간의 굴욕을 씻고 밝은 미래를 꿈꿀 계기가 됐다. 


극동에서 중동까지 아시아 옛 제국의 지식인들은 압도적인 기술력, 과학, 국가 조직력으로 아시아를 침략해온 서구에 어떻게 맞서야할지 궁리했다. 누군가는 옛 전통으로 돌아가자고 했고, 누군가는 옛 전통 따윈 버리고 서구의 이념, 제도, 기술을 통째로 이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두 생각의 중간쯤에서 절충해보자는 입장도 있었다.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1838~1897)가 없었다면 호메이니도, 빈 라덴도 없었다. 알아프가니가 촉발시킨 ‘이슬람 혁명’에 대해 미셸 푸코는 서구의 세계체제에 맞선 최초의 대반란이라고 평가했다. 이후의 이슬람 세계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을 고려하면 알아프가니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는 페르시아 출신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프가니스탄 출신 수니파라고 여러 차례 주장했고, 무슬림 세계를 돌아다니며 한 행동과 말 역시 텍스트로 전해지지 않는다. 오늘날 작가들은 마치 쪽물처럼 이슬람 세계 곳곳에 스며든 알아프가니의 영향력을 통해 그의 생각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알아프가니는 페르시아, 인도 등에서 이슬람 전통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당시 인도,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등 무슬림 세계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했거나 뒤늦게 서구 열강을 따라잡느라 허둥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후자였으나 그들이 추구한 위로부터의 개혁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오스만의 개혁이란 지배층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젊은 지식인들은 오스만의 서구화가 “극장 짓기, 무도장 드나들기, 아내의 외도를 너그럽게 이해하기, 유럽식 화장실 사용하기”로 구성됐다고 빈정댔다. 


그러나 알아프가니는 무슬림이 영광스러운 제국의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서구를 따라잡아야 했는데 그것은 군인에게 서양식 제복을 입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무슬림의 재부흥을 위해선 훨씬 더 철저한 변혁, 즉 정신의 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알아프가니는 이집트, 인도 등지를 여행하며 반제국주의 운동에 투신했다. 1879년 발표한 글에서 알아프가니는 영국이 인도에 운송, 통신을 개설한 이유는 인도의 부를 영국으로 빼가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서구식 학교의 목표 역시 인도인을 영국 행정에 쓰이는 도구로 훈육하기 위함이라고 지적했다. 근대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를 배운 현대인들에게는 상식 같은 얘기지만, 알아프가니 이전에 제국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런 통찰을 보여준 이는 없었다. 


알아프가니는 추상적 이론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서구에 맞선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정치적 행동주의자가 됐다. 이집트, 인도, 페르시아, 러시아를 돌며 무슬림의 단결과 행동을 촉구했다. 말년의 알아프가니는 오스만 술탄의 초청을 받아들여 이스탄불로 향했다. 술탄은 알아프가니를 자신을 위한 선동가로 활용하려 했으나, 계획이 여의치 않자 그를 사실상 연금했다. 체계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열정적인 행동가였던 알아프가니는 5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량치차오


량치차오(1873~1929)는 중국에서 서구의 침략에 가장 많이 노출된 광둥성 광저우 인근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다.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서구의 제도, 사상, 경제에 휘둘리고 있었지만, 중국만큼은 요지부동이었다. “우리가 곧 세계”, 즉 중화주의를 뼛속까지 간직했던 중국인들은 세계의 변화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다. 량치차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1897년까지도 그는 “중국을 인도나 터키와 비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자신과 자신의 스승인 캉유웨이가 주도한 무술변법이 실패한 이듬해에야 그는 중국이 서구의 눈에는 인도, 터키처럼 허약한 나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량치차오는 유생이었다. 기존 제도를 수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유교, 중국 사회의 전통 구조 역시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무술변법의 실패는 중국이 위로부터의 개혁 기회를 놓쳤음을 의미했다. 량치차오는 변법파 지식인을 체포하라는 서태후의 명을 피해 일본으로 향했다. 중국이 혼란에 빠지길 원치 않던 일본은 황제 폐위를 바라지 않은 개혁파 량치차오를 환대했다. 


그러나 량치차오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어갔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이 결정적이었다. 의화단과 이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출동한 서구 열강의 등쌀에 기겁한 서태후는 급히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황실의 위엄은 완전히 무너졌다. 캉유웨이는 유가 사상을 받드는 현명하고 가부장적인 군주가 중국의 근대화를 이끌 수 있다고 여전히 믿었지만, 량치차오는 공자나 황제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량치차오가 급진적인 공화제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는 쑨원이 선동하는 공화주의 혁명이 결국은 무정부 상태, 혼돈, 참주정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애로운 전제정’에 대한 마지막 희망 때문에 량치차오는 신해혁명 이후 쑨원에게 대총통 자리를 넘겨받은 위안스카이의 부름에 응했을 것이다. 량치차오는 위안스카이 치하에서 법무부 차관, 재정 고문을 맡았지만, 위안스카이는 량치차오가 기대했던 계몽군주가 아니었다. 량치차오의 정치 참여는 부패하고 난폭한 군벌들과의 타협으로 끝났다. 



타고르


타고르(1861~1941)의 중국 방문을 주선한 이가 량치차오였다. 타고르는 영국령 인도에서 큰 부를 일군 사업가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서구식 교육을 받은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19세기 후반 인도인들을 사로잡은 과격한 반서구주의에도,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에 합류하자는 ‘인도의 유럽화’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타고르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되 가난한 시골 사람들의 곤경을 이해했고, 서구식 산업문명의 광휘를 목격하고서도 산업화 이전 문명이 그보다 도덕적으로 뛰어나다고 믿었다. 타고르는 “아시아인의 세계주의”를 지향했지만, 유럽의 방식으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가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1913년 노벨상 수상은 전기였다. 전세계에서 목소리를 낼만한 아시아인이 극소수였던 당시 상황에서 타고르의 명성은 확고했다. 허옇고 긴 수염, 강렬한 눈빛, 커다란 키에 전통 의상을 입은 타고르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회상대로 “고대 동양의 마법사”같은 풍모를 풍겼다. 세계 각지에서 열린 초청 강연에서 타고르는 서구의 근대 문명을 기계에 비유하며 비판했다. “기계의 유일한 임무는 성과를 이루어내는 것이기에, 성공을 추구할 때면 도덕적 죄책감을 어리석고 부적당한 감정으로 경멸한다.” 


타고르는 러일전쟁의 승전국 일본을 좋아했다. 타고르는 열강의 반열에 오른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인 간의 협력을 증진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타고르의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다. 신일본은 서구의 모조품일 뿐이며, 일본의 범아시아주의란 아시아 이웃에 대한 야욕을 감춘 말에 불과하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타고르는 일본 강연에서 일본의 ‘진보’에 대해 우려했지만, 총리 등의 고관을 포함한 청중들은 유럽 식민지의 지식인이 발흥하는 제국 청중에게 건네는 쓴소리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중국 방문은 더욱 큰 수난이었다. 군벌들 사이의 내전이 한창이던 1924년의 중국인들은 딴 세상에서 온 듯한 시인이 근대 서구문명을 비판하고 아시아의 오랜 덕목을 찬양하는 말을 무시했다. 한때 타고르의 시를 번역했던 마오둔은 “국내의 군국주의자들과 국외의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당하는 우리에게는 꿈꿀 시간이 없다”고 말했고, 타고르의 연설장에서는 “우리는 철학이 아니라 유물론을 원한다”는 구호가 터져나왔다. 타고르는 남은 강연을 취소하고 중국을 떠났다.  


그러나 타고르는 정치에 무관심한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프랑스 군인들이 중국의 유산 원명원을 잿더미로 만든데 대해 분노했고, 아일랜드의 독립을 방해하는 잉글랜드를 “독립해서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생명체를 토해내지 않으려는 이무기”라고 비유했으며, 러시아 혁명의 실험에도 관심을 보였다. 오랜 일본인 친구인 시인 노구치 요네지로가 일본의 “아시아를 위한 아시아” 전쟁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하자, 타고르는 “내가 사랑하는 일본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뉘우치기를 바라네”라고 답장했다. 


근대 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오락가락했다. 전통을 거부했다가 다시 받아들였고, 시대를 오판해 자신의 말을 뒤집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 출신의 저자는 근대 아시아 1세대 지식인의 좌충우돌, 고군분투가 “제1차 세계대전의 대량 학살을 계기로 나날이 진보하는 합리적 세계라는 19세기의 신념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던 유럽 사상가들의 동요를 예견”했다고 평가한다. 서구의 근대성은 승리했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 인종청소, 무력분쟁, 양극화를 해결하지 못한 이 승리는 “패배나 다름없는 승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