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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욤비

욤비 토나·박진숙 지음/이후/340쪽/1만6500원


국가의 역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국민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우선이다. 그러나 간혹 나라가 보호해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난민이다. 주로 정치, 종교, 성정체성과 관련해 자유를 제약받거나 생명을 위협받아 난민이 된다. 2011년말 현재 전 세계 난민의 수는 3000만명을 넘는다. 나라의 체제가 불안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중동 지역 나라와 소말리아, 수단, 콩고민주공화국 등 아프리카 나라들에서 난민이 대거 발생한다. 


중동이든 아프리카든 한국과는 멀어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은 1992년 국제연합의 난민협약에 가입했고, 2001년부터 난민 인정자가 나왔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모두 294명이다. 신청자 4516명중에 대기중인 사람이 포함됐다고 치더라도 인정률이 10%대에 불과하다. 김구, 안중근, 안창호, 윤봉길 등 독립운동가는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도 한때 ‘난민’이었음을 기억한다면 한국의 난민 심사는 지나치게 까다롭고 야박하다고 할만하다.  


콩고민주공화국 출신의 욤비 토나는 한국의 좁은 난민 심사 관문을 통과한 ‘행운아’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난민 신청 기각, 이의 신청 기각에 이어 법무부를 상대로 한 행정 소송까지 치른 끝에 겨우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그렇게 하는데 6년이 걸렸다. <내 이름은 욤비>는 욤비 토나의 파란만장한 삶을 한국인 박진숙이 인터뷰해 정리한 책이다. 대학에서 아동가족학과 박사 과정을 이수중인 박진숙은 이주 여성의 자립을 돕는 사회적 기업 에코 팜므의 대표이기도 하다. 


콩고는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국토를 가진 나라다. 욤비는 그곳에서 작은 왕국을 다스리는 왕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욤비의 집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집안일을 도와준 노예들이 있었는데 욤비는 누군가를 ‘인간만도 못한 존재’로 여기는 신분 제도가 얼마나 부당한지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수도에 있는 킨샤사 국립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한 욤비는 나라의 민주화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당시 콩고는 독재자가 독재자의 뒤를 잇는 혼란한 상황이었다. 장학금을 대주겠다는 한 교수의 조교가 되면서 욤비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한동안 욤비와 친분을 쌓은 교수는 어느날부터 욤비에게 낯선 사람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법, 외모로 사람의 직업이나 나이를 짐작하는 법, 모르는 언어로 된 문서를 암기하는 법 등을 가르쳤다. 교수는 비밀정보국의 지령으로 학생을 정보원으로 포섭하고 있었던 것이다. 졸업 후 욤비는 정보국 요원이 됐다. 그 사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안정적인 생활을 꾸려가는 듯 했다. 


정권이 교체되는 혼란한 와중에 욤비는 정부군과 반군이 이권을 주고받으며 은밀한 거래를 하고 있다는 증거를 입수한다. 야당에 관련 문서를 건냈다 들킨 욤비는 곧 국가반역죄로 수감돼 모진 고문을 당한다.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탈옥한 욤비는 가짜 여권을 가지고 여장을 한 채 중국으로 떠난다. 당시 지인이 영향력을 행사해 비자를 구할 수 있는 나라가 중국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욤비는 중국이 ‘마오의 나라’라는 사실밖에 몰랐다. 제3국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 대사관을 들락거리다 얻은 비자가 한국행이었다. 욤비는 어느 보따리 장수의 옷꾸러미를 전해주는 대가로 인천행 배에 몸을 싣는다. 욤비는 콩고의 가족에게 “평양에 가서 연락하겠다”는 편지를 썼다. 남한과 북한도 구분하지 못하는 콩고의 전직 정보요원이 말 한 마디 안 통하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땅에 도착한 것이다. 


짐작하다시피 이후로는 6년에 걸친 고생담이 펼쳐진다. 대사관은 곤경에 빠진 해외의 자국민들에게 마지막이자 든든한 배경이 된다. 그러나 욤비는 자국 대사관을 찾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오히려 정부와 관련 있어 보이는 사람은 일단 피하고 봐야했다. 


한국이 난민협약 가입국이라는 사실을 알아 난민신청서류를 낼 때까지만 해도 일이 일사천리로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욤비의 기대와 달리 한국은 ‘열린 사회’가 아니었다. 관청의 문은 높았고, 시민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난민신청 기간에는 원칙적으로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욤비에겐 돈이 없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담당자는 “심사 결과가 언제 나올지 장담 못한다. 일을 구할 수 있다면 해도 좋다. 하지만 불법이란 걸 잊지는 말라”며 애매한 말을 남겼다. 욤비는 살아남기 위해 법을 어겨야 했다.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돕기는커녕 착취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불법으로 일을 한다는 것을 빌미로 임금을 적게 주거나 더 가혹한 노동을 시키는 ‘사장님’들이 있었다. 이 ‘악덕 사장’들은 불법 체류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성능이 떨어지는 기계 부속품으로 봤다. 


일보다 모진건 편견이었다. 한국의 공장에는 카스트 제도가 있었다. 한국인이 왕, 조선족이 신하였고 필리핀이나 베트남 출신자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이 카스트 제도의 밑바닥에는 아프리카계 흑인이 있었다. 욤비는 종종 이름 대신 “새끼야”라고 불렸다. 길거리에 나가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사람들, 버스 옆 자리가 비어도 앉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열악한 노동조건이나 인종차별이야 여느 이주노동자도 경험하는 일이겠지만, 욤비에겐 난민신청이라는 더욱 강고한 벽이 있었다. 사장 눈치를 보며 휴가를 내 경기도 구석에서 서울까지 수차례 인터뷰를 하러 와야했다. 물은 걸 또 묻고, 다음 번에 다시 묻는 기나긴 절차가 이어졌다. 조사관들의 기본 태도는 ‘불신’이었다. 욤비는 정치적 이유로 가족을 남겨둔 채 조국을 떠나온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익명의 지인들로부터 비공식적인 도움을 받아야했다. 콩고에 남은 이들의 안전을 위해 숨겨야할 정보들이 있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조사관들은 진술의 앞뒤가 완벽히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욤비의 말을 믿지 않았다. 통역의 어려움도 있었고, 콩고의 제도, 문화에 대한 정보 부족과 그에 따른 오해도 있었다. 심지어 한국의 활동가가 콩고까지 가서 가져온 서류들도 무시했다. 한 정보요원이 나라를 배신하고 해외로 탈출했다는 현지 신문 기사는 “콩고 신문은 조작이 쉽다”는 이유로, 어렵게 빼낸 욤비에 대한 심문 기록은 “손으로 쓰여저 신빙성이 적다”는 이유를 댔다. 게다가 조사관들이 콩고에 대해 얻는 정보의 원천은 대부분 주한 콩고 대사관에서 나왔다. ‘배신자’ 욤비를 잡아들이려는 대사관이 그에 대해 호의적인 정보를 줄 리 없었다. 


그래도 <내 이름은 욤비>에서 감동적인 대목은 필요할 때마다 ‘기적’같이 다가오는 도움의 손길이다. 콩고 대사관 직원들로부터 도망쳐 서울역 앞을 헤맬 때 다가와 이주노동자를 돕는 신부를 소개해준 학생, 굶주린 욤비에게 음식을 내준 여관 아주머니, 생판 모르는 욤비에게 거처를 제공한 어느 출판사 사장, 수임료 한 푼 없이 법률 조언을 해준 변호사들…. 욤비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건 “감사하다”는 말 뿐이었으나, 그들은 순전한 선의에서 욤비를 도왔다. 


물론 ‘선의’가 언제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갓난 아기를 스다듬는 것은 호감에서 나온 행동이겠지만, 만지는 사람의 손이 지저분하다면 그 호감은 나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난민 같은 약자에 대한 도움도 마찬가지다.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정부에 관계된 인물을 소개시켜준다면 받는 사람은 그것을 선의라고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욤비의 지난한 이국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라면 ‘연대의 중요성’ 혹은 ‘친구의 필요성’ 정도가 될 것 같다.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이해해주는 친구가 있다면, 설령 그곳이 지옥이라 하더라도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힘든 노동과 기나긴 법적 절차에 지쳐가던 욤비가 힘을 얻은 것은 난민지원단체 ‘피난처’에서의 활동이었다. 욤비는 피난처에서 몇 차례 자신의 경험을 강의했고, 나중에는 아에 그곳에서 일을 했다. 월급은 공장에 다닐 때와 비교할 수 없이 적었지만, 피난처에서의 경험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난민을 돕는다는 보람과 자기 자신에 대한 치유를 모두 안겨줬다. 


서두에 밝혔다시피 욤비는 한국에 난민신청을 한 수많은 사람 중에서도 ‘해피 엔딩’을 경험한 소수에 속한다. 그러나 욤비의 해피 엔딩은 외견상 그럴 뿐이다. 욤비는 콩고에 남아 은둔 생활을 하던 아내와 세 아이를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한국에 온 가족들이 욤비처럼 고된 노동을 하거나 막막한 고독감에 시달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어느 정도 한국에 적응한 뒤로는 문화적 충돌이 시작됐다. 아이들은 한국어, 한국문화에 빠르게 적응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 통치를 경험한 사실은 알아도, 콩고가 벨기에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은 잊어버렸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 한국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콩고 음식은 맛없다며 한국 음식을 못하는 엄마에게 투정을 했다. 남편이 일을 나가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 사이 홀로 남겨진 아내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혼자서는 슈퍼에 가서 물건 하나 사기 힘들었던 그에게 한국은 또다른 감옥이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아내는 심리상담사와의 상담 이후 상태가 좋아졌고, 한국어 수업을 들으며 조금씩 세상 밖으로 발을 디뎠다. 


<내 이름은 욤비>는 한국이 국제사회의 일원임을 자처하기 전에 생각해봐야할 몇 가지 문제점을 함께 제시한다. 외국과의 사이에 사람, 돈, 상품이 많이 오간다고 해서 국제사회가 아니라, 보편적 인권의 기준을 충족하고 타문화의 가치를 이해해야 국제사회다.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2011년 기준으로 13%인데 이는 세계 평균인 30%에 크게 못미친다. 이른바 ‘다문화 교육’에도 문제가 있다. 한국의 다문화 교육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한국문화에 익숙해지도록 가르치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삶의 뿌리가 뽑힌 채 한국에 이식된 사람을 스스로 서게할 수 없다. 다문화 교육의 목표는 개인의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한국 사회의 핵심 가치에 적응하게 하는 쪽으로 유도해야 한다. 


난민이라는 다소 생소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다뤄지는 이의 삶이 극적이고 서술이 평이해 청소년도 읽을만하다. 책 중간중간에 콩고의 역사나 난민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팁들을 넣어 교육적인 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 배려했다. 책 전체의 주체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내 이름은 욤비>를 읽고 나면 한국이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 수출할 수 있는 건 핸드폰, 자동차 뿐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경험’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 욤비는 성공회대 대학원에 진학해 다양한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한국이 민주주의적 제도를 선취할 수 있었던 배경, 경제성장의 이면 등에 대해 토론했다. 이 무형의, 그러나 소중한 ‘상품’을 계속 수출할 수 있는지는 많은 시민들의 마음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