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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난하지만 빈곤하지 않은 리슨투더시티







남산 회현시범아파트는 44년이라는 세월을 고려하면 상당히 깨끗하게 관리된 편이었다. 이곳에 둥지를 튼 젊은 예술가들은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들의 행동은 '어떻게든 되겠지'식의 근거 없지만 낙관적인, 그래서 사랑스러운 패기에 근거한다. 물론 거대한 상대에 맞서야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표정에는 30% 정도의 망설임과 두려움도 스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 30%가 오히려 이들을 응원하게 만든다.     



남산 회현시범아파트의 사무실 부근에서 포즈를 취한 리슨투더시티 멤버들. 왼쪽부터 정영훈, 권아주, 박은선씨. /김창길 기자



예술 공동체 ‘리슨투더시티’의 사무실은 1970년 완공된 남산 회현시범아파트에 자리 잡고 있다. 어둡고 구불구불한 미로 같은 복도를 따라가니 이들의 거처가 나왔다.

한가하게 남산으로 향하는 케이블카가 보이는 사무실에서 리슨투더시티의 멤버들과 마주앉았다. 디자이너 정영훈씨(30)는 도배하지 않은 벽을 자랑했다. 이전의 수많은 거주자들이 몇 겹으로 붙여둔 벽지가 나이테처럼 드러나 있다. 리슨투더시티의 작업 역시 도시의 감춰진 속내를 드러낸다. 

리슨투더시티는 미술가 박은선씨(34), 디자이너 권아주씨(30)·정영훈씨, 영화감독 김준호씨(34)로 구성된 시각예술가 집단으로 용산참사가 일어난 2009년 결성됐다. 박은선씨는 “건축가, 시각예술가들이 용산참사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고 돌이켰다. 많은 젊고 창의적인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이들도 울타리 안에서 자족하는 예술을 거부했다. 청계천 복원, 용산참사, 카페 마리 점거,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에 대해 연구하고 시위나 작업 등으로 실천에 옮겼다. 도시 바깥 문제에도 손을 댔다. 영주댐 건설로 파괴되고 있는 낙동강 내성천의 ‘한평 사기 운동’이 그 예다. 환경운동가 지율 스님과 함께 운동을 주도한 박은선씨는 “도시가 조성되는 과정에서 파괴된 것을 살피다보니 사고의 관점이 넓어졌다”고 말했다.

이들은 요즘 ‘전환도시’라는 주제에 몰두해 있다. 지난 9일 광주비엔날레에서 ‘점거의 기예’란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고, 18일 서울 신촌 창천교회에서 여는 ‘자립의 기예’ 심포지엄을 준비 중이다. 자본과 권력이 지배하는 도시를 어떻게 공공의 장소로 돌릴 것인가(점거), 예술가들은 그곳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자립)를 다룬다.

자본주의 질서에 불만을 느끼는 세계 곳곳의 사람들에게 점거는 공통의 이슈다. 터키 탁심 게지 공원, 월스트리트, 홍콩 센트럴에서 시위대는 도시를 점거했다. 한국의 시위 문화도 점거에 익숙하다. 두리반, 밀양, 광화문 등에서 일단 텐트부터 친다. 그런데 점거 시위에 효과가 있긴 있는 걸까.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 이후에도 미국 중심의 금융 질서는 여전하며, 2008년 촛불시위 이후에도 미국산 쇠고기는 별 일 없이 유통된다. 박은선씨는 “점거가 무효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일단 공통공간을 점거하면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평소라면 쉽게 누리는 편의를 포기한 사람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강하고 일상을 정지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점거 공간에 모인 사람들끼리 미시적인 자치를 해나갈 수 있다.

자립은 제도권 밖 예술가들의 생존 조건과 관련돼 있다. 리슨투더시티 구성원들의 공통적인 답은 “답이 없다”였다. 경제수준이 높은 나라들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예술 분야 지원금을 대폭 줄였다. 세계의 독립 예술가들은 저마다 살길을 찾고 있다. 카페나 구제용품 가게를 운영하고 브라질식 바비큐 굽는 기술을 익힌다. 작업을 하기 위해 크라우드펀딩 등에 의존하지만 여의치 않을 때가 많다. 박은선씨는 “세계 어디를 가도 예술가는 거지같이 산다”고 말했다.

‘자립의 기예’ 포럼 이튿날인 19일 신촌 ‘차없는 거리’에서 열리는 전환도시 페스티벌은 도시가 자신의 욕망을 돌아보고 회복력을 가질 수 있을지 살피는 행사다. 한때 부흥했으나 이제는 특색도, 문화도 없이 죽어가는 상권인 신촌을 전환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태양열 조리기구로 요리하고 실험음악을 연주한다.

이들도 자신들의 개입 효과가 크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안다. 예술가는 배제되고 가난하다. 권아주씨는 “매번 같은 질문을 듣는다. 메시아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박은선씨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얘기했으니 그 말에 책임을 질 뿐”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가난’과 ‘빈곤’을 구분했다. 돈이 없는 건 가난이고 친구까지 없는 건 빈곤이다. 리슨투더시티는 “우리는 가난하지만 빈곤하진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