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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가 지났는데도 책이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이번 주도 회의가 길었다. 고민 끝에 이 책을 골랐는데 예상보다 잘 읽혔다. 대동법을 전공한 저자라 대동법의 착안, 실행, 완성 과정에 관여한 4명의 정치인, 관료를 다뤘다. 저자의 의도도 그런 것이겠지만, 하나같이 요즘 정치 상황을 연상시킬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이정철 지음/역사비평사/324쪽/1만7000원


국정을 맡아달라는 권유에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며 귀를 씻은 허유와 소부의 고사에서 볼 수 있듯, 현실 정치판을 멀리한 채 학문을 닦으며 은거해 사는 것은 동북아 지식인들의 한 이상이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기억하는 조선의 지식인들도 대체로 현실 정치와 상관 없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이들이었다.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등 조선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은 모두 당대 조정과 자의 혹은 타의로 거리를 두고 지내거나 한직을 전전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왕을 보필하며 구체적인 정책을 세우고 실행한 정치인, 관료 없이 어떻게 한 나라가 운영될 수 있었을까. 물론 현실 정치에 발을 담근다는 것은 불명예, 굴욕, 비난의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정책을 세운다해도 거기엔 늘 반대 세력이 있으며, 게다가 그 정책이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보장도 없다. 학문의 실패는 개인의 실패이지만, 정책의 실패는 수많은 사람의 삶과 직결된다. 정치인과 관료들은 정책의 성공을 위해 진흙탕에서 드잡이질을 할 각오까지 해야한다. 인조, 효종 대의 정치인 김육(1580~1658)은 “대신이 명예를 좋아하고 비방을 두려워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혼자서만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험난한 시기였던 16~17세기를 살아낸 경세가 4명의 평전이다. 중종부터 효종에 이르는 왕이 재위한 이 시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전염병과 극심한 흉년이 겹쳐 민생이 피폐했다. 저자는 조선의 개국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제치고 권력을 획득한 사대부 중 몇몇이 이 시기에 들어 세상을 운영하는 방법에 관한 문제, 즉 경세(經世)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본다. 담세자들에게 세금의 80% 가까이를 줄여준 조선 최고의 개혁법인 대동법도 오랜 진통 끝에 이 시기에 정착될 수 있었다. 


처음 만날 사람은 율곡 이이(1536~1584)다. 이이는 5000원권 화폐의 주인공, 신사임당의 아들, 퇴계 이황의 제자 등으로 알려진 지식인이지만, 이 책 속에선 정치가로서의 이이를 다룬다. 사실 조선 성리학의 두 거두라 할 수 있는 이황과 이이가 갈라지는 지점도 여기다. 수렴청정기를 비롯해 20년간 절대권력을 휘두른 문정왕후의 사후에 진행된 ‘과거청산기’였다. 문정왕후의 권력에 기댔던 인물들은 모두 살해되거나 귀향을 떠났다. 명종은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야를 막론하고 당대 최고의 인물로 평가받았던 이황에게 조정에 나와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다음 임금인 선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의외로 이황은 “경제(經濟)에 재주를 갖고 있지 않다”며 임금의 뜻을 거부하고 학문의 길만 걷는다. 


하급관리였던 이이는 선조 대 초반에 이르러 조정에 남아있던 구세력들을 거세게 비판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71세의 영의정 이준경의 말이 “불분명하게 호도”됐다고 임금에게 아뢰는 식이었다. 이이, 기대승 등의 신진 사림 세력은 자신들의 도덕적·정치적 정당성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당시 이이에게 사림은 ‘현실의 정치 세력’이 아니라 ‘정의를 실천하는 군자’였다. 그리고 선조 5~6년에 이르러 조정은 마침내 이들 ‘군자’들로 가득찼다. 


이 시점에서 이이는 의문에 휩싸였다. 구태를 일삼던 구신들이 물러가고 선의로 가득찬 사림 세력이 권력을 잡았는데 왜 나라꼴은 하나도 바뀌지 않는가. 적절한 사람을 적절한 자리에 기용했는데 왜 결과는 나오지 않는가. 이이는 ‘사람’이 아니라 ‘방법’이 문제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황이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새 정치의 계책”이라고 말했을 때 대부분의 지식인은 여기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이는 의리를 넘어선 실효를 강조했다. 급기야는 “지금의 법을 변경하지 않는다면, 공자나 맹자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조정에서 도를 강론하게 해도 시대를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할 만한 술책을 강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이이는 도(道)가 지식인들의 추상적 언어가 아니라 국가 운영의 원칙임을 천명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허나 이이는 동인과 서인의 분열을 막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념 투쟁의 와중에 말년에는 ‘소인’으로까지 몰리며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오리 이원익(1547~1634)은 이이보다 덜 유명하지만 이이보다 더 많은 결과를 얻어낸 정치인이었다. 


사실 이원익은 탁월한 재주를 가진 이는 아니었다. 대동법 실행에 기여하긴 했지만 그것을 입안하거나 완성한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 개혁을 추구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청렴한 처세, 따뜻한 마음가짐, 상식적이고 실용적 사고 등이야말로 이원익이 가진, 그러나 동세대 사대부들에게는 결여됐던 요소들이었다. 


이원익의 정치 경력에서 의미 있는 출발점은 안주 목사 재직 시기다. 그는 임명된 이튿날 곧바로 혼자 말을 타고 안주로 떠났다. 임명 뒤에도 한동안 서울에 머무르며 유력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 사이 현지 아전들이 신임 수령을 모시러 서울에 오면 그들과 함께 부임지로 내려가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이원익은 안주에서 아전들이 담당하던 전세(田稅) 운반도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사실 전세 수취 및 납부는 지방관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지만 아랫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다. 이원익은 원칙대로 신속하게 행함으로써 민생을 안정시켰다. 


백성들에게 존경받았기에 이원익은 임진왜란 때 쓰러져가는 나라를 붙잡을 수 있었다. 왜군이 서울로 밀려오자 선조는 이원익을 평안도 순찰사에 서둘러 임명했다. 서울을 떠나 도망치기로 한 임금이 갈 수 있는 곳은 황해도, 평안도 등 북쪽 지역밖에 없었다. 임금에 대한 신뢰가 바닥이었기에 이 지역 민심을 달랠 수 있는 이원익을 먼저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이원익의 충성은 임금 개인이 아니라 나라에 대한 것이었다. 이는 선조가 내치려했던 전쟁영웅 이순신을 수차례 변호한데서도 나타난다. 


이원익은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선조, 광해군, 인조를 거치며 주요 관직에 머물렀지만 두어 칸 짜리 띠집에 거주했다. 인조가 내린 새 집을 수 차례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받은 것도 유명한 일화다. 임금이 신하에게 집을 내려준 이전 사례는 세종이 황희에게 내린 한 번 뿐이었다.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士大夫)를 현재 개념으로 풀면, 사는 학자고 대부는 정치인 혹은 관료다. 학자가 독립적이고 비판적이라면, 정치인 혹은 관료는 조직의 일원으로 명령을 따르고 동료들과 협력해야 한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학자이자 정치인이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포저 조익(1579~1655)은 치열한 학자이자 노련한 정치가였다. 


하급 관료였던 조익은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관직에서 물러나 미뤄둔 공부에 열중했다. 광해군 8년, 9년 잇달아 높은 벼슬이 내려졌으나 조익은 응하지 않았다. 이렇게 은거하는 시기, 조익은 오히려 전국적인 인물로 성장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부가 공공성을 갖고 있지 않으면 재야에 공공성이 생기는 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조익은 그 공공성의 대표 인물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조익은 이조 좌랑에 임명된다. 조익이 반정 세력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는 점에서 파격이었다. 예조판서, 오늘로 치면 장관이었던 시기에도 조익은 서울에 집 한 채, 말 한 필 없었다. 바로 그런 빈곤 대문에 백성의 현실을 잘 느끼고 있었고, 민생에 도움이 되는 대동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대동법에는 여러 가지 반론이 있었다. 사익이 줄어드는걸 두려워하는 기득권자의 몽니도 있었지만, 설득력있는 반대자들도 있었다. 조익은 합리적인 반론들을 하나씩 논파했다. 이념을 앞세우는 대신 구체적으로 설득했다. 대동법을 평생의 지론으로 삼았지만, 대동법 반대론자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줄 알았다.


잠곡 김육은 대동법을 완성시킨 인물이다. 저자는 이이를 실천적 지식인, 이원익을 유능하고 헌신적인 관리, 조익을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학자라 부른 뒤, 김육은 정치가라고 말한다. 정치인은 당위적 요구보다 현실 그 자체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지식인과 다르고, 규정된 절차보다 정책의 목표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관리와 다르며, 개념적 논리보다 현실의 변주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학자와 다르다. 최초 제안부터 성립까지 100년이 걸린 대동법을 마무리하는데 있어서는 정치인 김육의 역할이 중요했다. 


오늘날에도 복지 정책에 대한 논란이 있다. 복지예 많은 예산을 투입할 경우, 국가재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일각의 의견이다. 대동법을 둘러싸고도 같은 논란이 있었다. 대동법의 뜻은 이상적이었으나, 막상 실행하면 국가재정이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김육은 안민과 국가재정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고 보고,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시했다. 


서인 세력의 수장이자 대동법을 반대한 김집과의 갈등 양상도 오늘날에 시사점을 준다. 효종은 김집과 김육을 모두 중용했다. 그러나 둘의 목표는 판이했다. 김집과 그의 제자 송시열, 송준길 등은 당대 최고의 세도가 김자점을 몰아내려 했다. 대의 대신 상황논리에 따라 기민한 처세술을 발휘해온 김자점은 김집 세력의 눈에 전형적인 구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김자점을 몰아내야 올바른 뜻을 펼 수 있다고 본 김집은 일단 세력 확장을 꾀했다. 뜻이 같은 사람을 우선 천거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김육은 달랐다. 같은 이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실무를 잘 아는 사람을 천거했다. 일만 잘한다면 그의 신분이 아무리 미천해도 상관이 없었다. 김육은 79세로 세상을 뜨기 하루 전날까지 대동법 실행에 힘을 써달라고 영의정에게 사람을 보냈다. 


수백 년전 조선시대 이야기지만, 오늘날 정치 상황과 연관시켜 새겨볼만한 상황들이 많다는 점이 흥미롭다. 오늘날의 문제가 예전에도 똑같이 벌어졌고,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조금은 빨리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즐거움일 것이다. 저자는 서문 제목을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라고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