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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누가 함께 싸울 것인가. <언노운>
리엄 니슨 넘 멋져. 베를린도 멋져. 어떤 배우는 나이가 들면서 별 연기 안해도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대단한 존재감을 만들어내는데, 브루노 간츠가 프랭크 란젤라에게 쓰러지는 모습에선 어휴... 오늘 어느 분이 문자로 "뼈속까지 스며드는 싸~한 베를린의 겨울"을 얘기하시던데. 그나저나 현빈은 좋겠다. 이 겨울에 베를린에 가서 맥주도 먹고 슈납스도 먹고.



막강한 적이 눈앞에 있습니다. 힘을 합쳐 싸울 이들은 누구입니까.


<언노운>은 신분을 빼앗긴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인 마틴 해리스 박사(리엄 니슨)는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학술회의 참석차 독일 베를린에 옵니다. 호텔에 도착한 순간 공항에 가방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해리스는 아내를 남겨둔 채 택시를 타고 돌아가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72시간 만에 깨어난 해리스는 만류하는 의사를 뿌리치고 호텔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아내는 자신을 못 알아봅니다. 게다가 그의 옆에는 낯선 남자가 마틴 해리스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해야 하는 해리스는 사고차량을 운전한 택시 기사(다이앤 크루거)를 찾아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려 합니다.

해리스의 정체성을 빼앗은 배후에 거대한 음모가 있다는 건 이런 종류의 액션 스릴러를 자주 봤던 관객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화사에서 ‘오인된 남자’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이 즐겨 다룬 테마이기도 했습니다. 결말에 대한 내용이라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이 음모 세력의 정체가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는 건 영화의 한 단점입니다.

그러나 거대한 적에 대항해 뭉치는 세력은 신선합니다. 먼저 동구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알린 상징적인 장소 베를린이 배경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리스가 처음 도움을 청하는 이는 구 동독 비밀경찰 출신의 노인입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의 주연이자 이제 70대에 이른 독일의 명우 브루노 간츠가 연기한 이 노인은 늘 기침을 달고 살며 틈만 나면 술잔을 채우는 모습이 알코올 중독을 의심케 합니다. 사무실에는 옛 제복을 입은 흑백사진들을 세워 놓았는데, 방문객이 물으면 늘 “좋았던 옛 시절”을 언급할 만큼 사회주의 동독과 자신의 직무에 대한 자부심과 향수가 가득합니다. 그는 비밀경찰로서의 오랜 경험, 인맥, 직관을 통해 해리스를 둘러싼 음모를 파헤칩니다.

해리스의 또다른 조력자는 택시 기사 지나입니다. 보스니아 출신 불법이민자인 그녀는 사고를 당한 뒤 목숨을 걸고 손님을 살려냈지만, 감사를 받기는커녕 경찰이 오자 몸을 피해야할 처지입니다. 그녀의 친구인 또다른 택시 기사는 아프리카에 있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지만 악당의 손에 죽음을 당합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이전이었다면 동독 비밀경찰과 보스니아 출신 이주노동자가 같은 편이 되는 영화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첩보영화에서 비밀경찰은 언제나 악당이었고, 보스니아 출신 이주노동자는 영화에 등장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종 승리’를 선언한 자본주의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신자유주의가 지구를 장악하고, “다문화정책은 실패했다”고 공공연히 선언하는 최근의 서유럽 분위기 속에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한 편에 섭니다. 물론 둘의 속내는 다릅니다. 비밀경찰은 순전히 직업적 호기심에서, 택시 기사는 영주권을 살 돈을 모으기 위해 적의 실체에 다가섭니다. 그러나 적의 힘이 너무나 세기에, 이들은 힘을 모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변화를 겪었습니다. 탈북자,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조선족 이모’, 베트남 신부가 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잡을지 10년 전만 해도 누가 알았겠습니까. 10년 뒤 통일이라도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때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출신 경찰은 누구와 손잡고 무얼 하겠습니까. 한국영화의 풍경이 벌써부터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