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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가 그의 리뷰를 받고 기뻐 날 뛸 정도로 유명한 것으로 묘사된 뉴욕타임스의 미치코 카쿠타니는 이 책에 대해 장문의 혹평을 씀. 책의 내용 뿐 아니라 인간 됨됨이까지 조롱하면서 묘사. 음..."서평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거구만" 싶음. 





안티프래질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안세민 옮김/와이즈베리/756쪽/2만8000원


1960년 레바논에서 태어난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월스트리트의 파생상품 트레이더로 일하다가 2006년 에세이스트로 전업했다. 2007년 내놓은 <블랙 스완>은 그의 출세작이다. 서구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모든 백조는 희다”는 명제를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검은 백조(블랙 스완) 두어 마리가 갑자기 발견됐다. 여기서 검은 백조는 과거의 경험으로는 존재 가능성을 확인할 수 없는 ‘극단값’이다. 이처럼 검은 백조는 예측이 불가능하고, 엄청난 충격을 동반하며, 일단 현실로 나타나면 뒤늦게 설명을 시도해 마치 그것의 출현이 예견 가능했던 것처럼 떠드는 사람들이 있는 현상을 빗댄다. 구글의 성공, 9·11 테러 등이 우리 세계의 ‘검은 백조’라고 탈레브는 말한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 큰 명성을 얻은 계기는 “앞으로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파국이 월스트리트를 덮칠 것”이라며 이듬해 일어난 월스트리트발 금융 위기를 예견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탈레브의 경고를 비웃었지만, 실제로 ‘검은 백조’가 나타나자 아연실색했다. 금융전문가, 투자자 모두 그들이 손댄 파생상품이 휴지조각으로 변할지 사태 전날 밤까지도 예측하지 못했다. 탈레브가 <블랙 스완>에서 검은 백조의 출현에 대비할 방법을 상세히 알려준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수긍하는 것이 생존의 시작이라고 강조한다. 


두툼한 분량의 신작 <안티프레질>은 검은 백조가 나타날지 모르는 세상에서의 생존 방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준다. 그는 분석보다는 직관에, 설득보다는 독설에 기댄다. 학자라기보다는 예언자의 태도에 가깝다. 역사상의 많은 예언자가 그러했듯이, 이 책도 무관심하게 잊히기보다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격렬한 반응을 살 가능성이 높다. 


탈레브는 사전에 없어서 자신이 직접 만들어냈다는 ‘안티프래질’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공을 들인다. 안티프래질은 ‘부서지기 쉬운’이라는 뜻의 프래질(fragile)에 반(反)이라는 뜻의 접두사 안티(anti)를 붙인 신조어다. 그러나 탈레브가 말하는 안티프래질은 단순히 ‘강건한’ ‘회복력 있는’의 뜻을 넘어선다. 안티프래질이란 충격을 가하면 상태가 더 좋아지는 것을 뜻한다. 옛 가요의 가사를 빌려와 “아픈만큼 성숙해지는”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저자는 안티프래질 개념을 인류사 거의 모든 부문에 적용시킨다. 정치 체제, 진화, 현대 의학, 경제 등을 안티프래질 개념으로 설명한다. 소아시아 지역의 폰투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는 독살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독극물을 조금씩 섭취해 면역력을 기르려 했다. 경주마는 자기와 열등한 경주마와 경쟁하면 지고, 자기보다 우수한 경주마와 경쟁하면 이긴다는 속설이 있다. 비행기 조종 시스템이 자동화됨에 따라 사고 비율이 오히려 높아졌다. 도전 정신이 미숙한 조종사들이 따분한 상태에서 비행기를 조종하다 보니 생긴 현상이라는 것이다. 탈레브는 말한다. “스트레스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만들지는 않으며, 명백하게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 또 이렇게도 변주한다. “곤경에 과잉반응해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이 바로 혁신이다!” 아일랜드 혁명가의 가사는 안티프래질 개념을 잘 설명한다. “바리케이드가 높을수록 우리는 더 강해질 것이다.” 안티프래질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뿐이지, 이런 사고방식은 인터넷을 떠도는 유머에도 들어있다. 재벌 남자와 사귀고 싶으면 그의 뺨을 때려라. 그러면 그 남자는 이렇게 말한 뒤 당신과 사랑에 빠질 것이다. “내 뺨을 때린 건 니가 처음이야.”


정보 역시 안티프래질한 속성을 지닌다. 퍼트리고 싶은 소문이 있다면 이런 전제를 붙이는 것이 좋다.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보바리 부인>, <채털리 부인의 사랑> 등은 금서로 지정된 후 판매가 급증했다. 스캔들에 휘말린 연예인이나 예술가는 오히려 더 많은 명성을 누린다. 


탈레브는 키프로스 출신의 일란성 쌍둥이인 존과 조지의 예를 든다. 존은 은행 인사팀에서 25년간 일했고, 조지는 그 세월동안 택시기사였다. 존은 안정된 수입과 휴가를 얻은 반면, 조지의 수입은 들쭉날쭉했다. 괜찮은 것으로 보였던 존의 삶은 그가 50세가 되던 해 해고된 뒤 달라졌다. 25년간 한 곳에서 한 가지 일만 해왔던 그는 실직 후의 세상을 헤처나갈 방법을 알지 못했다. 한 마디로 그는 프래질했다. 반면 조지는 어느 날은 기름값도 못건졌지만, 또 다른 어느 날은 비행기가 결항돼 급히 다른 나라로 가야하는 손님을 태워 거액을 벌었다. 조지의 삶에 끊임없이 닥친 크고 작은 스트레스는 그를 튼튼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조지는 안티프래질했다.  


그러나 근대라는 것은 삶을 안정적이고 예측가능하고, 그래서 프래질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당장 택시기사 조지보다 은행원 존이 선망받는 직종 아니던가. 인간은 사회를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설계할 수도 있다는 생각, 즉 합리화로 특징 지어지는 시대정신이 지배했다. 하지만 근대의 ‘어설픈 개입’이 더 큰 화를 부른 경우는 부기시수다. 탈레브는 ‘의원성 질환’의 예를 든다. 이는 불필요한 치료로 인해 나타나는 질병을 말한다. 한때 병원에서 출산하는 산모의 사망률이 길거리에서 출산하는 산모의 사망률보다 높은 시절이 있었고, 편도선 절제 수술을 받은 아이들이 받지 않은 아이들보다 더 많이 사망했다는 통계도 있다. 인간의 합리성을 철저하게 신봉한 나머지, 세상만사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고 계획을 세우는 이들을 탈레브는 ‘소비에트-하버드 이상주의자’라 부르며 조롱한다.  


책의 대부분은 이 분야, 저 분야를 오가며 변화, 충격, 스트레스를 성장으로 이끄는 안티프래질한 면모를 갖췄을 때의 이득을 말한다. 타이타닉이 침몰하지 않았다면 선박회사는 그보다 더 유람선을 건조해 운항했을 것이고, 언젠가 검은 백조를 만나 타이타닉보다 더 큰 희생자를 냈을 것이다. 대형 쇼핑몰의 푸드 코트 식당 음식이 대부분 맛없는 이유는 모두가 어느 정도의 손님을 끈다는 사실, 즉 프래질하기 때문이다.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 실비아 플라스가 많은 현대인들이 그러하듯 항우울제 프로작을 복용했다면, 오늘 우리가 읽는 걸작이 탄생했을리 없다. 탈레브의 사레는 끝도 없다. 


한 생명체를 넘어, 전체 사회 속에서 누군가 도태되고 누군가 그에 자극받아 강해지는 모델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탈레브를 극단적인 자유주의자, 사회진화론자, 시장주의자로 여길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탈레브는 자신이 ‘휴머니스트’이며, “대자연의 무자비한 선택과 배신을 혐오한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피해를 입어야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개념도 싫다” “개인의 희생을 토대로 집단이 안티프래질하는 데에는 반대하는 입장이다”고도 밝힌다. 결말부에서 탈레브가 가장 격렬히 비난하는 것은 ‘프래질의 이전’이다. 예를 들어 정부는 대기업의 위험이 전체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대기업에 구제금융을 실시한다. 한국이 그랬고, 금융 위기 이후의 미국도 그랬다. 그러나 구제금융은 어느 누구도 실패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를 몰락시키는 시스템이다. 구제금융으로 인해 프래질은 대기업에서 중소기업 혹은 납세자에게 전가된다. 


금융 위기 이후 은행이 망하고 투자자들은 손해를 입고 서민들은 집을 잃었다. 그러나 금융권 고위 인사들은 오히려 두둑한 보너스를 챙겼다. 이는 ‘승부의 책임’이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탈레브는 여기서 ‘윤리’를 말한다. 의견을 펼쳤으면 그에 따르는 책임, 위험도 받아들여야 한다. 고대 로마의 건축가들은 교량을 지은 뒤 그 아래 일정 기간을 거주했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건축업자가 집을 짓고 그 집이 무너져서 집 주인이 사망했다면, 건축업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구절이 있다. 


탈레브는 승부의 책임을 지지 않는 유명 인사들에게 사정 없는 독설을 퍼붓는다. 유명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과 눈이 마주치고서는 “구역질이 났다”고 썼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라크 전쟁을 부추기는 칼럼을 쓰고도 그 결과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모기지업체인 패니매이의 재무 구조가 튼튼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썼지만, 그 회사가 금융 위기 이후 붕괴된 이후에도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다. 탈레브는 “스티글리츠가 생산 라인에 자신의 돈을 투자하는 사업가라면 그는 파산했을 것이고, 자연 속의 인물이라면 그의 유전자는 퇴출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르트르, 헤밍웨이, 미테랑 등이 비슷한 이유로 비판받는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생명체는 가변성으로부터 이익을 본다. 당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이 가변성을 좋아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음식은 맛이 없다. 노력이 없는 성과는 의미가 없다. 슬픔이 없는 기쁨도 의미가 없다. 불확실성이 없는 확신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리스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덕적인 삶도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다.”


산스크리트어로 ‘정신적 스승’을 뜻하는 ‘구루’란 말이 인기 있는 경영학 전문가를 칭하기 위해 쓰인 지도 꽤 되었다. 피터 드러커, 잭 웰치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경제·경영을 넘어 우리 삶의 금언이 될만한 철학적인 말로 독자를 사로잡곤 한다. 자본주의라는 경제원리가 한 사회의 근본을 설명하는 말이 될 정도로 경제가 중요해진 세상이기에 그런 듯하다. 탈레브도 마찬가지다. 그의 책 곳곳에는 니체풍의 신랄한 문장들이 박혀 있다. 분명 그는 구루 대접을 받을 것이고, 한국에도 이런 자격으로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탈레브는 예측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미래에 대해 예측한다”고 냉소적으로 썼다. 모든 책이 그렇겠지만, <안티프래질>도 믿을 수 있는 부분만 믿고, 나머지는 지적인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여기면 되겠다.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대로의 ‘안티프레질’한 태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