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에 해당되는 글 2건

  1. 안티고네 혹은 사제의 일
  2. 비극은 슬프지 않다, <비극의 비밀> (2)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3대 그리스 비극작가의 작품 6편이 선별 수록된 <그리스 비극 걸작선>(천병희 역/숲) 중에서 가장 마음을 움직인 것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였다. 기원전 441년쯤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 사후의 일을 다룬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왕권을 두고 다투었는데, 이 과정에서 폴뤼네이케스는 적국을 끌어들였다. 결국 형제는 전장에서 모두 죽고, 크레온이 새 왕으로 등극한다.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에게는 성대히 장례를 치러주되, 조국을 배신한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은 들짐승과 날짐승이 먹어치우도록 내버려두라고 명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친오빠의 시신을 장사 지낸다. 크레온은 왕명을 어긴 안티고네에게 분노하고 처형을 명한다. 


명색이 '고대'라 분류되지만, <안티고네>를 보면 당시에도 국가 권력은 꽤나 강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왕'인 전제군주 시대였지만, 크레온은 안티고네가 자신의 뜻을 여긴 것만큼 국가의 반역자를 도왔다는 점을 괘씸하게 생각한다. 끌려온 안티고네는 왕의 추궁에 당당히 답한다. 


안티고네 "제 혈족을 존중하는 것은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에요."

크레온    "그자(폴뤼네이케스)와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분(에테오클레스)도 네 혈족이 아니더냐?"

안티고네 "같은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혈족이지요."
크레온    "그렇다면 너는 왜 그자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분을 모욕하지?"

안티고네 "세상을 떠나신 분은 그렇다고 시인하지 않을 거예요."

크레온    "네가 그 불경한 자를 그분과 똑같이 존중하는데도?"

안티고네 "세상을 떠나신 분은 그분의 노예가 아니라 아우예요."

크레온    "그자는 이 나라를 유린하다가, 그분은 지키다가 전사했다."

안티고네 "아무튼 하데스는 그런 의식을 요구해요."

크레온    "그래도 착한 이에게 나쁜 자와 같은 몫이 주어져서는 안 되지."

안티고네 "하계에서는 그것이 신성한 규칙인지 누가 알아요?"

크레온    "적은 죽어도 친구가 안 되는 법이지."

안티고네 "나는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려고 태어났어요."


크레온은 왕의 명령, 국가의 질서, 이승의 규칙을 강조한다. 이곳에선 조국의 반역자를 기려서는 안된다.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고, 각자에겐 응분의 보상과 징벌이 따라야 한다. 물론 그 선악이란 국가에 얼마나 충성했는지에 달려 있다. 반역자나 적은 죽어서도 친구로 삼을 수 없다. 이곳은 그런 곳이다. 


안티고네는 세상의 법을 따를 생각이 없다. 조국을 배신한 자일지라도 그와의 핏줄은 하늘이 맺어줬다. 안티고네는 세속의 선악 기준조차 믿지 않는다. 인간이 '악'으로 규정하는 행동이 신이 보기에도 '악'일까. 인간의 법, 규칙, 명령을 어기거나 그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증오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안티고네는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폴뤼네이케스의 시신 앞에 선 안티고네. 니키포로스 리트라스 작. 


세속의 법 대신 천상의 질서에 복무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사제라고 부른다. 안티고네의 행동은 사제의 한 역할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천상의 질서를 따르는 과정에서 지상의 법을 어길 경우도 있다. 그래도 사제라면 지상의 법을 어기길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한 나라의 사람 모두가 그를 기이하게 여긴다 하더라도, 사제는 세상의 시선이 아니라 천상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이슬람권의 몇몇 국가를 제외한다면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세속주의를 따르고 정교분리 원칙을 지킨다. 보편의 여론을 어기면서까지 신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사제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을 그를 광신자라 부를 것이다. 광신자에게 세상을 흔들만큼 강한 수단이 주어졌을 때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옴진리교의 사린 가스 테러가 한 사례다. "지금 세상은 썩었기에, 새 세상을 열기 위해선 이 세상을 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사제가 있다면, 국가는 그를 요주의 인물로 여길 것이다. 옴진리교처럼 테러라도 계획한다면, 국가는 그들을 탄압할 것이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원칙이란 것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오불관언'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했다.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목사도 있었다. 그는 "미친 운전기사가 버스를 몰고 있을 때 기독교인의 본분은 그 버스에 치어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주고 기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운전기사를 끌어내리는 것"이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기실 영혼의 평화와 사회의 정의는 분리돼 생각할 수 없다. 불의로 가득찬 세상에서 제 영혼의 평화만을 추구하는 종교인이 있다면, 그 영혼은 순수한게 아니라 마비된 것이다. 


세상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제에게 '정교분리'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사제가 잘못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사제의 말이 보편의 생각을 거슬렀을수도 있다. 나 역시 현 정권을 '제2의 유신'이라거나 '독재정부'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한 사제의 인식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비판에 대해 "묵과하지 않겠다"고 답하는 지도자에게 있으며, 진정 정교분리의 원칙을 어긴 이들은 지난 정권 당시 권력자에게 빌붙어 영향력을 행사하려한 대형 교회 사람들이다. 


안티고네는 처형됐다. 그리고 그 처형은 줄줄이 또다른 비극을 불러왔다. 안티고네에겐 군대도, 돈도 없었다. 그저 혈육을 장사 지내려는 마음밖에 없었다. 한국의 늙은 사제에겐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대통령에겐 없는 것이 무엇일까. 모든 것을 가진 권력자가 아무 것도 없는 사제를 윽박지르는 풍경은 늦가을처럼 스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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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아니고, 정말 조만간 희랍 비극 읽기에 도전 예정. 마침 집에 챙겨둔 책이 있었음. 예전에 강대진 선생 책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그린비) 읽은 뒤 <일리아스>에 돌입한 바 있음. 기대.




베르나르디노 메이, <아이기스토스와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살해하는 오레스테스>, 1654년, 이탈리아 시에나 살림베니 궁전 소장.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죽이고 있다. 그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는 이미 피를 흘린 채 쓰러졌다. 오레스테스의 뒤에는 복수의 여신 둘이 나타났다. 



비극의 비밀

강대진 지음/문학동네/400쪽/2만2000원


서양고전학자인 저자는 ‘비극’이 ‘슬픈 이야기’라는 통념을 반박한다. 실제로 오늘날 ‘비극’으로 번역된 희랍어 ‘tragoidia’에는 ‘슬프다’는 뜻이 들어있지 않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독자들이 특히 희랍 비극을 읽을 때 등장인물이 처한 불행과 겪는 고통에 초점을 맞춘다면 핀트가 어긋난 독서가 되기 쉽다. 희랍 비극이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이 불행, 고통 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 해도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희랍 비극을 읽어내기는 지난한 일이다. 기껏해야 오이디푸스, 엘렉트라 정도의 이름을 정신분석학의 용법대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제 한 말이 오늘 무의미해지는 세상에서, 희랍 비극은 2500년 세월을 너끈히 견딘 텍스트다. 거기엔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다. 단지 희랍 비극의 위대함을 직접 알기 위해선 몇 가지 사전 지식이 필요할 뿐이다. <비극의 비밀>은 희랍 비극에 대한 최상급의 가이드북이라 할만하다.


저자는 12편의 희랍 비극을 ‘콩알 헤아리기’ 식으로 세세하게, 그러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정수를 뽑아 설명한다. 주제와 줄거리를 문학적으로 해석하거나 거기서 인생의 교훈을 끌어내는데 그치지 않고, 초심자가 지나치기 쉬운 형식적·구조적 특성까지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특성이 어떤 의미를 낳는지 분석함으로써 깊이 있는 독서로 안내한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3부작 비극인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보자. 아르고스의 아가멤논 왕이 트로이아 전쟁에서 돌아와 자기 부인 클튀타임네스트라의 손에 죽는 과정을 그린 <아가멤논>, 그로부터 7년 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가 복수의 여신에게 쫓겨다니다가 아테나이에서 재판을 받고 풀려나는 <자비로운 여신들>이 그 3부작이다. 


내용만 보면 오늘날 한국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어떤 드라마들 이상으로 패륜, 불륜, 피범벅이지만, 아이스퀼로스는 이 비범한 작품 안에 복수라는 인간 감정의 원초적 요소와 그것이 법이라는 문화 형태로 해소되는 과정을 그려냈다. 아가멤논, 클뤼타임네스트라, 오레스테스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어 가족 중 누군가를 죽였고, 그 살인에 대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의 죄과를 주고 받았다. 하지만 인간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이러한 피의 복수는 어디선가 중단돼야 한다. 이를 위해 도입된 것이 <자비로운 여신들>에 나타난 재판 제도다. 말하자면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인류 역사에서 사고가 비약하는 순간을 재현해 보인 것”이다. 


오늘날의 드라마·연극·영화 관객은 극의 결말을 미리 알려주는 ‘스포일러’에 민감하지만, 고대 그리스 관객들은 줄거리를 이미 알고 비극 공연을 보았다. 관건은 속속들이 알려진 이야기를 각기 다른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다르게 보여주느냐 하는 점이었다. 소포클레스는 오레스테스보다 그의 누이 엘렉트라에게 더 주목했다. 엘렉트라는 자기 아버지를 죽인 자들과 한 집에 살면서 그들의 처분에 숙식을 맡겨야 하는 비참한 처지다. 그래도 엘렉트라는 누구보다 섬뜩한 복수심을 간직한 채, 어머니를 찌르려는 동생에게 “한 번 더 쳐라”고 외치는 인물이다. 


반대로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에서는 정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악인들이 온화하고 예의바르게, 정의를 집행하는 이들이 극단적이거나 나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는 아예 농부의 아내로 물동이를 든 채 등장한다. 오레스테스는 복수할 마음은 있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매번 주변 사람들에게 방법을 묻는 우유부단한 남자다.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에서 “이루어진 정의는 불분명하나 거기 수반된 고통은 너무나 뚜렷하다.”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는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감당할 수 없어 쩔쩔매는 젊은이들이다. 


가장 유명한 희랍 비극이라 할 수 있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특유의 집요한 이성으로 안개 뒤의 진실을 찾아나서지만, 결국 그 진실에 의해 파멸한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 최고 권력자는 내전을 치른 적의 장례를 금지하지만, 안티고네는 그렇게 널부러진 오빠의 장례를 당당히 치른다. 여기서 남성이 만든 국가의 법과 여성이 지키는 가족의 법이 충돌한다. 권력자가 증오와 차별을 내세우자 안티고네는 사랑과 평등을 이야기한다. 


멀게만 느껴졌던 희랍 비극이 한 뼘 앞으로 다가온 듯 하다. 이제 원전 번역을 읽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