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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병과 죽음의 차가운 해부, <아무르> (3)

한국의 많은 상업영화 창작자들이 그러하고, 관객들도 그것을 원하는 듯 보인다. 슬픈 영화는 슬픈 영화, 웃긴 영화는 웃긴 영화, 무서운 영화는 무서운 영화임을 영화 속에서 수차례 강조하기. 많은 관객이 이미 영화의 장르를 이해하고 표를 끊었을텐데도, 혹시라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봐 친절을 베푸는 걸까. 강조의 방법은 여러 가지다. 우선 음악. 한국 상업영화와 미국이나 유럽 영화를 비교하면 가장 넘쳐나는 것이 음악이다. 슬픈 감정을 고조시켜야할 때가 되면 30초 전쯤부터 "지금 슬픈 장면임"이라고 알려주는 음악을 틀어준다. 웃긴 영화에선 말장난이 애용된다. 유머가 목표물을 벗어날 때도 있는데, 그럴 때 감독들은 시트콤 연출자가 부러울지도 모른다. 시트콤에서는 관객의 웃음소리 음향효과를 낼 수 있으니까. 배우들의 연기도 영화의 장르를 명확히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영화 내내 몇 번 쯤 절규하고 오열하고 그러다 콧물까지 흘려야 '열연'했다는 평을 받는다.


갑자기 한국영화 이야기를 한 이유는 어제 본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 때문이다. 하네케는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영화감독"이라 불리길 원하고 있을까. 영화의 냉정한 그래서 잔인한 터치는 시신의 가슴팍을 주욱 그어내리는 부검의의 메스 같았다. 물론 여기서 시체는 나다. 


<아무르>는 한 노부부의 이야기다. 전직 피아니스트이자 피아노 선생이었던 아내는 어느날 아침을 먹던 중 최면에라도 빠진 듯 멍하게 앞만 바라보는 상태에 빠진다. 아내는 몇 분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회복되지만, 남편은 아내의 증상이 심상치 않아 병원으로 데려간다. 간단한 수술일줄 알았지만 수술은 실패로 끝난다. 오른쪽 육신이 마비된 채로 집에 돌아온 아내는 "날 다시는 병원으로 보내지 말아달라"는 약속을 해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는 아내가 죽을 때까지 진행된다. 아내가 죽는 것은 스포일러가 아니다. 영화 첫 장면에서 소방관들이 잠긴 문을 뜯고 들어와 부패가 진행된 아내의 시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단정하게 누운 아내의 머리 맡에는 꽃이 장식돼 있다. 남편은 보이지 않는다. 


아내의 증상이 조금씩 악화된다. 육체가 허물어지는 것보다 끔찍한 것은 한 때 높았던 자존감이 허물어진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어느 도시에 사는 듯 보이는 이들은 지금은 유명해진 옛 제자들이 여는 연주회에 가기도 하고,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르농쿠르에 대한 신간을 읽고, 이웃들로부터도 존경을 받는 그런 노부부다. 자족적이고 품위 있던 부부의 삶은 와병 이후 완전히 무너진다. 사람이 늙어 병들고 죽어가는 과정은 오래전 떠난 유아 시절로 돌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오줌을 가리지 못하며, 말도 잃어간다. 아내는 "아파, 아파"만 반복한다. 밥도 잘 먹으려들지 않는다. 마치 떼를 쓰는 아기처럼.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의 주연이었던 에마뉴엘 리바(사진 위)는 1927년생이다.<남과 여>(1966)의 주연이었으며 <세 가지 색: 레드>(1994)에서도 이미 '노판사'였던 장 루이 트렝티냥은 1930년생이다. 


합리적이고 차분하며, 무엇보다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는 남편은 이 과정을 묵묵히 견딘다. 간병인을 주 3회 부를 뿐이다. 딸의 도움도 거부한다. 사실 딸이 온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요양병원에 보내려하지도 않는다. 정신이 온전할 때의 아내가 병원에 돌아가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정신이 온전할 때의 아내는 무엇보다. "인생이 너무 길다"고 말했다. 이 긴 인생을 끝내달라는 숨은 요구가 담긴 말이었다. 남편은 물론 당치 않은 소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통제할 수 없는 육신에 갇혀버린 아내의 자존감은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남편으로선 아내의 속내를 짐작해야 한다.  


하네케는 이 과정을 마치 시험관을 관찰하는 과학자처럼 그려낸다. 카메라는 종종 한 곳에 매우 오랜 시간 머문다. 노역 배우들의 움직임이 느리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카메라의 잔재주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감정을 관객에게 미리 알려주길 원치 않는 듯 보이기도 한다. 화면 바깥에서 들리는 배경음악도 없다. 몇 차례 나오는 음악은 영화 속 상황(연주회, CD 듣기)에서 나올 뿐이다. 


관객은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기에, 하네케의 실험실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 역시 고통스럽다. 이 영화를 연출했던 차가운 감독의 마음은 어떘을까. 그 역시 고통스러웠을까. 아니다. 그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오는 남자다. 


내가 "오스트리아는 변태의 나라"라는 편견을 갖게 된 것은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를 본 뒤였다. 에곤 쉴레의 몇몇 그림도 그런 이미지를 굳힌 것 같다. <피아니스트>의 주연 여우였던 이자벨 위페르는 <아무르>에서 조연인 딸로 출연한다. 


<아무르>는 하네케의 전작인 <하얀 리본>보다 더 호소력있는 영화다. <하얀 리본>은 사람에 따라서 관심이 덜할 수도 있는 '파시즘의 발흥'이라는 거시적 주제를 담고 있지만, <아무르>의 주제는 70억 인구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몇 가지 해명되지 않은 단상들(집으로 들어온 비둘기, 터너의 그림을 연상케하는 풍경화의 이어진 샷들 등) 때문에 한 번 더 보고 싶기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꽤 묵직한 용기를 내야 하는 영화가 <아무르>다. 



세계에서 가장 차가운 변태 감독, 미하엘 하네케(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