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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국가의 아들들, <스카이폴>

<영화평론> 제25호에 수록된 글



제임스 본드와 애스턴 마틴. 본드는 국산차를 사랑합니다. 


1962<살인번호>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지난 50년간 대중을 즐겁게 했던 영화 속 스파이 제임스 본드에게 부모가 있었던가. 물론 모든 인간은 누군가의 자식이기에, 본드에게도 부모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 어느 관객이 본드의 나이든 부모를 궁금해 하겠는가. 본드에겐 젊고 매력적인 본드걸이 수없이 많은데.


그런데 2012년 나온 23번째 공식 제임스 본드 영화 <스카이폴>은 본드의 부모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꺼낸다. 영화 초반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동안 자체 휴가를 가진 뒤 소속기관인 MI6에 복귀한 본드는 다시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지 여부를 판가름하는 체력 및 심리 테스트를 받는다. 심리 테스트는 검사관이 단어를 제시하면 본드가 연상되는 단어를 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국가-잉글랜드”, “-발사”, “살인-등으로 원활하게 진행되던 테스트는 스카이폴이란 질문에서 파국을 맞이한다. 당황한 혹은 싸늘한 표정의 본드는 끝났다고 말한 뒤 서둘러 일어나 버린다. 영화 종반부에야 밝혀지는 스카이폴의 의미는 본드의 고향집 이름이었다. 왜 본드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집 이름에 그토록 민감한 반응을 보인 걸까.

 

<스카이폴>에서 본드를 괴롭히는 악당은 전직 MI6 요원인 실바다. 매우 유능한 요원이었던 실바는 권한을 넘어 중국 정부의 정보를 캐다가 곤경에 처한다. 현재 본드의 직속 상관이기도 했으며 당시엔 실바의 상관이었던 M이 실바를 다른 요원들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중국 정부에 넘긴 것이다. 실바는 모진 고문을 받고 자살을 기도한 끝에 가까스로 살아남아 M과 조직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007영화의 많은 악당들이 돈 혹은 광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지만, 실바의 범죄는 그런 이유와는 무관하다. M를 벌하는 것만이 실바의 목표다.


실바는 제 발로 찾아와 붙잡힌 본드를 묶어둔 뒤 한 우화를 들려준다. 어느 섬에 쥐가 들끓었다. 사람들은 함정을 파놓고 쥐들을 유인해 붙잡은 뒤 그대로 두었다. 시간이 흐르자 배가 고파진 쥐는 서로 잡아먹었고, 마지막에는 가장 강하고 잔인한 쥐 두 마리만 남았다. 사람들은 그 쥐를 죽이는 대신 섬에 풀어놓는다. 이제 두 마리의 쥐는 다른 쥐들을 잡아먹는다.


실바는 과거 가장 유능한 요원이었던 자신과 현재 가장 유능한 요원인 본드가 두 마리의 쥐라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자신과 본드가 비슷한 처지임을 강조한다. 비록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두긴 했지만 본드에 대한 실바의 태도는 무척 호의적이다. 아니 그것은 호의를 넘은 애정이다. 실바는 본드의 탄탄한 허벅지를 쓰다듬고, 셔츠를 풀어젖혀 가슴을 만진다. 본드에 대한 실바의 태도는 연인 혹은 피를 나눈 형제를 향한 것처럼 보인다.



저 남자의 손길에는 애정이 묽은 초콜렛처럼 묻어있다!


실바와 본드가 비슷한 처지라는 것은 실바의 헛된 주장이 아니다. 냉정한 표정의 배우 주디 덴치가 연기하는 M은 실제로 실바와 본드를 같은 방식으로 대했다. 국가 안보 혹은 조직의 영속이라는 목적을 위해 요원이라는 수단을 희생시키기. 영화 초반부 본드는 중요한 정보를 탈취해간 범인을 추적하다가 달리는 기차 지붕 위에서 주먹다툼을 벌인다. 본드를 돕기 위해 파견된 또다른 요원 이브는 멀찌감치서 그들에게 총을 겨누는데 둘이 엉켜 있어서 차마 쏘지 못한다. 전화기 너머에서 상황을 보고받던 M그냥 쏴버려라고 수차례 명령한다. 결국 이브는 방아쇠를 당기고, 총에 맞은 본드는 기차 바깥으로 떨어지면서 그 유명한 007 영화 특유의 현란한 오프닝 시퀀스가 시작된다. 오프닝 시퀀스가 끝난 뒤 등장한 M은 다시 한번 예의 냉정한 표정으로 해군 중령제임스 본드의 부고를 작성하고 있다.


총상을 당하고도 목숨을 건졌지만, 본드는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대니얼 크레이그는 본드 역할을 맡은 첫 영화 <007 카지노 로얄>(2006) 때에 비해 실제로 나이든 기색이 역력하며, <스카이폴>은 야속하게도 대중이 사랑해온 본드라는 첩보원의 늙음을 그린다. 본드는 MI6로 돌아와 받은 체력 및 심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 즉 본드는 첩보원 세계의 퇴물이 된다. 그럼에도 M가까스로 합격했다고 거짓 통보를 한 뒤 본드에게 다시 임무를 준다. 명예회복의 기회를 준 것일 수도, 결자해지하라는 권유일 수도 있지만, 그 어느 쪽이라 하더라도 턱걸이 몇 개에 가쁜 숨을 몰아쉬고 눈 앞의 표적지도 맞추지 못하는 요원이 다시 현장에 투입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M은 본드에게 또다시 조직에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실바는 본드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본드가 M의 지시에 의한 발포로 총에 맞은 것을 알고 있고, 사실은 체력 및 심리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도 본드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자신과 본드 모두 M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번역된 대사는 아주 나쁜 상관이군이었지만, 실바 역을 맡은 하비에르 바르뎀은 실제 대사에선 “Mommy was very bad"라고 말했다. ”엄마는 정말 나빴어라고 번역됐을 경우 한국 관객이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점이 고려된 걸까.


MMI6 요원들에게 상징적인 어머니. 그러나 이 어머니는 한없는 모성애로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니다. 오히려 자식들에게 불가능한 임무를 요구하고, 때로 그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고 강요하는 나쁜 어머니. 자식들의 희생은 가정, 007 영화의 경우 대영제국이라는 국가를 위해서다. 그동안의 007 영화 속 제임스 본드는 영국의 정보기관에 소속돼 있긴 했지만, 사실상 초국적의 악당과 싸워왔으며 그 싸움은 딱히 영국의 안위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스카이폴>에선 영국이라는 실제의 나라를 환기시키는 장치들이 자주 등장한다. 영국 국기인 유니언잭이 유독 자주 등장하는데, 심지어 M의 책상을 지키는 불독 인형조차도 유니언잭 모양의 옷을 입고 있다. M은 영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다는 빅토리아 시대의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를 청문회에서 읊는다. 또 본드와 Q는 미술관에서 영국 근대 미술의 아버지인 윌리엄 터너의 그림을 본다. 테니슨의 시와 터너의 그림은 모두 한때 위용 있었으나 이제는 전과 같지 않은, 그러나 여전히 위엄을 갖추고 싶어하는 영국를 은유하는 작품들이다.


말하자면 실바와 본드는 M이라는 유사 어머니의 말에 따라 국가라는 유사 가정의 안위를 위해 투쟁해온 의형제였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두 형제는 각기 다른 길을 걷는다. 실바는 어머니와 가정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본드는 여전히 어머니와 가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본드는 천애고아였다. 스코틀랜드의 지주였던 부모가 비명횡사한 이후, M, MI6, 국가는 그의 어머니이자 가정이었다. 그가 심리 테스트의 스카이폴이란 단어에 그토록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도 상징적인 어머니, 상징적인 가정의 자리를 차지한 M, MI6, 국가 대신 핏줄로 이어진, 그래서 더욱 근원적인 생부모와 실제 가정을 뒤늦게 떠올리게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 종반부, 본드는 실바를 스카이폴 저택으로 유인한다. 왜 본드는 굳이 오랜 기간 찾지도 않았던 스코틀랜드 풍의 그 커다랗고 음침한 저택을 찾아와야 했던 것일까. 수구초심이 아니다. 본드는 스카이폴 저택을 완전히 부순 뒤 그 기억을 완전히 지우고 싶어한다. 그래서 실바와 그 수하들의 엄청난 무기 앞에 저택을 노출시켜, 총과 수류탄과 포탄을 맞게 한다. 헬리콥터가 추락하고 프로판 가스통이 터져 스카이폴 저택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 본드는 난 원래 이 집이 싫었어라고 말한다. 그것은 진심이다. 본드의 표정은 스카이폴 저택이 무너질 때보다 아끼는 자동차 애스턴마틴이 부서질 때 더 세게 일그러진다.


스카이폴 저택을 지키던 집사 킨케이드는 M에게 설명한다. 저택에는 종교 재판 시대에 사용되던 비밀 통로가 있었는데, 오래전 저택이 습격당했을 때 어린 본드 역시 그 통로에 숨어 수일을 버텼다. 그 사이 생부모는 죽었다. 킨케이드는 말한다. “거기서 나왔을 때 본드는 사내가 됐죠.” 본드는 여전히 자신이 사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생물학적인 부모보다 더 크고 강한 M, MI6, 국가라는 부모와 가정에 헌신하기 위해, 생부모의 남은 유산인 스카이폴 저택을 완전히 허무는 상징적인 살부의식이 필요했던 셈이다.



유니언잭이 바람에 펄럭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맹목적이다. 여기엔 어떤 합리적, 이성적 판단이 끼어들 여지도 없다. 적어도 <스카이폴>의 감독 샘 멘데스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사실 대니얼 크레이그와 멘데스는 정확히 10년전에도 만나 이런 주제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영화가 <로드 투 퍼디션>이었다.


듬직한 인상의 배우 톰 행크스가 연기한 마이클 설리번은 고아였다. 이후 설리번은 자신을 거둬준 범죄조직의 보스 존 루니(폴 뉴먼)의 부하이자 양아들이 되었다. 루니는 입이 무겁고 일을 깔끔히 처리하는 설리번을 신뢰한다. 그러나 문제는 친아들 코너(대니얼 크레이그). 코너는 다혈질인데다가 오만해 설리번처럼 믿음직하지 않다. 능력으로 치면 친아들 코너보다 양아들 설리번이 더욱 앞서지만, 존은 당연하게도 결정적인 순간 코너를 지키고 설리번을 처내기로 마음먹는다.


설리번도 마찬가지다. 양부 존은 갈데없는 자신을 거둬준 뒤 살만한 환경을 만들어줬지만, 그와의 인연조차도 핏줄의 진함을 이길 수 없다. 코너는 설리번의 큰아들이 자신의 살인 현장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설리번 가족을 죽이려 하고, 실제로 설리번의 아내와 둘째 아들을 죽인다. 설리번은 큰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한다. 그것이 양부 존을 배신하는 일이라도 상관없다.


<로드 투 퍼디션>은 설리번의 큰아들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얼마나 큰 영웅이었는지를 조곤조곤 설득시키려 든다. 아버지가 잔인한 킬러였다는 사실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가 아버지였고, 자신을 포함한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를 영웅으로 볼 근거는 충분한 것이다. 심지어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죄를 안고 떠난다. 아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 않기 위해, 죽어가면서도 마지막 남은 악당을 제거한다. 아버지의 목숨이라는 댓가로 아들은 남은 생애 손에 총을 들지 않았고, 죄를 지을 필요도 없었다. <로드 투 퍼디션>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경제젹, 사회적 계약을 넘어선, 근원적이고 맹목적인 것이다.

 

<스카이폴>의 실바는 자식을 버린 어머니 M에게 복수를 하려 들었다. 그러나 역시 버림받은 본드는 끝내 M을 지켜냈고, 심지어 새로 등장한 M(이번엔 남성인 랠프 파인즈)에게도 충성 혹은 효를 맹세한다.


본드에겐 혈연보다 상징적인 부모 자식 관계가 더 중요했던 것일까. 본드의 애국심이란 <로드 투 퍼디션>의 부자 관계만큼 본능적이다. 그래서 <스카이폴>의 마지막 장면, MI6의 옥상에 선 본드 뒤로 그렇게 많은 유니언잭이 펄럭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스카이폴>에서 가장 합리적인 인물은, 많은 돈이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M의 죄에 대한 벌을 요구하는 실바일지도 모른다. 실바는 나를 버린 국가에 충성하거나, 나를 버린 부모에 효도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악당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 난 퍽 이상하게 느껴진다.




본드의 (양)어머니와 (양)아버지 . 군사부일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