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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무 늦게 도착한 <상실의 시대>

왜 그런지 홍보사는 기쿠치 린코가 제대로 나온 스틸 사진을 릴리즈하지 않았다. 죄다 옆모습 뿐이다. 물론 기쿠치 린코는 21살처럼 안보이면서 21살이라고 우겼지만, 그래도 멋있었다.

나오코, '노르웨이의 숲'을 부르는 레이코 여사, 누워있는 와타나베. 영화 <상실의 시대> 중.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군에 이름을 올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출세작 <노르웨이의 숲>은 1987년 일본에서 처음 발간됐고, 전세계 36개국에서 번역해 1100만부가 팔렸다. 이 책이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한국에서 출간된 것은 1989년. 역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상실의 시대>가 한국에서 인기를 끈 맥락은 여느 나라와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다.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뤄졌고, 경제성장의 과실을 따먹기 시작했던 1990년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책은 1960년대 말 일본이 배경이다. 서구의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학생을 중심으로 한 변혁 운동에 휩쓸려 있던 당시의 일본, 20살 언저리의 화자 와타나베는 아름답지만 병든 나오코, 생기 넘치는 미도리 사이에서 방황한다. 통속적인 삼각관계 소설로도, 학생 운동 세대의 후일담으로도 읽을 수 있는 <상실의 시대>는 바로 그런 이중성 때문에 격변의 한 시기를 갓 통과한 한국의 청년들을 사로잡았다. 여전히 사회변혁의 깃발을 부여잡고 있던 한국 문단은 청년 독자들의 변심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영화 <상실의 시대>가 21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린 파파야 향기>, <씨클로>로 유명한 트란 안 훙 감독은 1994년 프랑스에서 원작을 처음 읽은 뒤 영화로 만들 뜻을 품었고,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무라카미에게 영화화 권리를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책을 영화로 만드는데 도통 관심이 없던 무라카미는 2009년 결국 판권을 넘겼으며 영화는 지난해 완성됐다.

영화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와나타베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와타나베와 기즈키·나오코 커플은 절친한 친구였는데, 기즈키는 17살의 나이에 갑자기 자살한다. 와타나베는 도망치듯 도쿄로 떠나 대학생이 됐지만, 학생운동의 격렬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채 음악 카페의 아르바이트로 소일한다. 이후 와타나베는 우연히 나오코와 마주치고, 나오코의 스무번째 생일날 둘은 동침한다. 그러나 마음의 병이 깊어진 나오코는 한적한 요양원으로 향한다. 와타나베는 생기발랄한 대학 동창 미도리와 만난다.

미도리와 와나타베.

무라카미가 트란 안 훙에게 영화화를 허락한 건 적절한 선택이었다. 트란 안 훙은 원작의 삼각 구도를 흔하디 흔한 통속 드라마로 전락시키진 않을 정도의 능력은 가진 감독이다. 매우 고즈넉하고 감상적이다가 가끔 미칠듯 격렬한 영화를 만들곤 했던 그는 <상실의 시대>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냈다. <상실의 시대>는 서둘러 이야기를 진행시키기보다는 인물들의 감정이 만드는 분위기를 묘사하는데 더 집중한다. 창 밖의 빗소리, 바위 건너 파도 소리, 정사를 앞둔 연인의 숨소리 등 세심하게 활용된 음향은 영화의 장점이다. 분위기가 워낙 적막하고 세심하다보니, 문자 메시지 오는 소리라도 들린다면 와장창 깨질듯하다. 요양원 주변의 바람부는 숲과 들판에서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오랫동안 나누는 대화와 몽환적인 정조만으로도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와타나베 역의 마츠야마 겐이치는 향후 몇 년간 일본을 대표하는 젊은 남우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인다. 나오코 역의 기쿠치 린코는 일본 여배우들에게서 보기 드문 메소드 연기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2011년에 볼만한가. 원작이 한국에서 인기를 끈 지도 20여년이다. 한국 청년들의 삶과 관심사도 크게 변했다. 물론 어떤 테마는 수천 년이 흘러도 여전히 청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상실의 시대>가 제시하는 나른한 허무, 권태, 욕망은 아무래도 90년대에 더 어울리는 어휘였던 것 같다.


<상실의 시대> 등장 인물 중 3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원인은 마음으로 전해질 뿐 명백히 제시되진 않는다. 그래도 힘겹게 원인을 찾아보면 삶의 밑바닥에 내재한 불안, 허무, 상실감 정도로 꼽을 수 있겠다. 그러나 몇 차례의 전지구적 금융 위기와 이에 따른 생존 경쟁에 내몰린 오늘날의 청년들은 불안, 허무, 상실감을 느낄 여유조차 없다. 그저 한 발 뒤엔 낭떠러지일 뿐이다.


<상실의 시대>는 만듦새가 좋다. 어떤 관객의 감수성을 격렬하게 건드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감수성은 이 시대를 지배하진 않는다. 

와타나베 역의 마츠야마 겐이치. 앞으로 많은 일본 영화에서 볼 것 같다. 그러나 역시 그의 역할 중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