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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밀레니엄 이후 10년-영화
1999년 12월 31일, 난 종로에 있었다. 그 인파 속에서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숫자인 2000년을 맞으며, 난 밀레니엄 버그니 뭐니 하는 재난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내심 이상한 자기 파괴 욕구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11년후, 난 기자가 돼 이런 기사를 쓰고 있다. '밀레니엄 이후 10년'이라고 거창하게 제목을 붙였지만, 사실 연말 결산을 좀 특색있게 해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기획이다. "1990년대에는 박찬욱, 김기덕, 이창동, 홍상수, 봉준호(는 딱 2000년)가 있었지만, 2000년대에는 누가 있는가"라는 유운성 프로그래머의 말이 계속 남는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늠름한 전두환 대통령의 초상을 보라.


지난 10년간 한국영화계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전문가들은 대기업 중심의 영화산업 재편과 제작자 및 비평 파워의 감소를 주요 변화로 꼽았다. 아울러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이 가장 많은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았다.

경향신문이 각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평론가 등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2000년대 들어 개봉된 최고의 한국영화를 복수로 추천받은 결과, <살인의 추억>은 가장 많은 3명의 전문가들에게 선택됐다.

<살인의 추억>에 대해서는 “스릴러 장르의 흥분과 은밀한 도덕적 질문을 결합시킨 작품”(영화평론가 김영진), “장르와 의미를 좇는 한국영화 흐름의 직격탄이자 이후의 판세를 예고한 영화”(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이상용), “지난 10년의 한국영화 가운데 장르 영화의 작가적 진화를 보여주는 대표작”(서울환경영화제 프로그래머 황혜림)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봉준호 감독의 또 다른 작품 <마더>(2009)는 2명의 전문가들로부터 추천받았다. “사회의 무의식과 정치, 욕망을 가장 영리하게 보여주는 한국 대중영화의 진수”(영화평론가 신은실)라는 평이었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 원빈의 목을 비틀고 있는 이는 요즘 가장 각광받은 배우 송새벽.

아울러 김동원 감독의 2003년작 다큐멘터리 <송환>(“한국 다큐멘터리 역사의 한 장을 두텁게 마무리한 기념비적 작품”·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유운성), 이창동 감독의 2010년작 <시>(“여전히 한국영화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상용), 홍상수 감독의 2005년작 <극장전>(“형식적인 혁신에 놀란 영화”·신은실)도 2명의 지지를 받았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쉽게 모이지 않았다. 많은 영화가 1표를 차지했다. 그 가운데 홍상수 감독 4편(오! 수정·극장전·밤과 낮·하하하), 봉준호 감독 3편(플란다스의 개·살인의 추억·마더), 박찬욱 감독 3편(복수는 나의 것·올드보이·친절한 금자씨), 임권택 감독 2편(춘향뎐·하류인생), 장률 감독 2편(망종·경계), 이창동 감독 2편(밀양·시)이 추천받았다.

김동원 감독의 <송환>. 김정일도 젊었다.

CJ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등 대기업 자본 위주로 제작·배급·상영 시스템이 재편된 것은 지난 10년간 한국 영화산업의 최대 변화였다. 영화평론가 배주연은 “1990년대 후반부터 하나둘 사라지던 동네극장들이 2000년대 들어 자취를 감추고 멀티플렉스 상영관들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며 “상업영화는 이제 전면적인 물량공세가 가능해졌고, 이는 1000만 관객 시대를 예비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유운성은 “멀티플렉스와 메이저 배급사 체제에 기반한 와이드 릴리즈 방식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이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대한 욕망을 더욱 부추긴 물적 토대가 됐다”고 지적했다.

대기업 자본의 득세와 함께 1990년대 한국영화의 중흥을 이끌었던 제작자들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영화만들기의 주체였던 제작사가 에이전시로 전락했다”(이상용), “블록버스터 멘털리티가 산업을 지배하면서 투자사 중심의 기획영화가 제작자 중심의 영화사를 배제하고 있다”(김영진)는 평이 나왔다. 이와 함께 “2003년 영화전문 월간지 ‘키노’의 폐지로 대표되는 영화 비평의 퇴조 경향”(배주연)도 지적됐다.

향후 10년간의 한국영화 전망에 대해서는 낙관과 비관이 교차했다. 이상용은 “당분간 새롭게 등장한 젊은 감독들이 1만명 관객을 돌파하면서 의미있는 작은 영화를 만드는 동시, 한편으로는 대작 영화를 통한 제작방식이 계속 모색될 것”이라며 “양극화 현상 속에 어떤 쪽이 대중의 마음을 얻을지 보이지 않는 긴장축이 형성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영진은 “저예산 독립영화를 만드는 젊은 감독의 층이 두터워졌는데, 이들의 영화가 주류 영화산업과 어떤 시너지를 맺느냐가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신은실은 “대자본의 독과점 시스템을 제도적으로 견제하고 이윤에 직접 지배되지 않는 창작 활동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메인스트림 상업영화마저 고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운성은 “지난 10년간 국내외에서 동시에 주목받은 한국 작가들(봉준호, 김기덕, 이창동, 박찬욱, 홍상수)은 대체로 1990년대 데뷔한 이들”이라며 “2000년대 데뷔한 이들 가운데 다음 10년에 위의 감독들과 같이 될 이가 누군지를 점치기 힘들다”고 말했다.



설문에 참여하신 분들(무순)

김영진(영화평론가), 이상용(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신은실(영화평론가), 배주연(영화평론가), 황혜림(서울환경영화제 프로그래머), 유운성(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홍상수의 <밤과 낮>. 이 영화는 내게 홍상수의 베스트일뿐 아니라 2000년대의 베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