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키아타루'에 해당되는 글 2건

  1. 철학자에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이 치열한 무력을>
  2. 문학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의 전작에 대한 블로그글에서 일부 인용(자기 표절?)


이 치열한 무력을

사사키 아타루 지음·안천 옮김/자음과모음/408쪽/1만7000원


사사키 아타루는 일본에서도 시골인 아오모리에서 1973년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봐 도쿄대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종교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야전과 영원-푸코·라캉·르장드르>는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이었다. 그는 논문을 들고 10군데 출판사를 돌아다녔으나, 무명의 저자가 쓴 800여쪽의 학술서를 선뜻 내겠다는 곳은 없었다. 


2008년 <야전과 영원>을 가까스로 출판하고 2년 뒤 내놓은 책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었다. 제목은 사사키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인 파울 첼란의 시에서 따왔다. 그는 이 책에서 서구에는 역사를 뒤바꾼 여섯 가지 혁명이 있다고 설명한다. 중세 해석자 혁명, 대혁명, 영국혁명,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이다. 사사키가 중점적으로 살피는 것은 맨 앞의 두 가지다.


11세기말 피사의 한 도서관 구석에서 먼지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전 50권)이 600년만에 발견된다. 중세인들은 이 법전에서 그동안 잊혀졌던 정치한 법 개념, 법률 용어를 입수했고, 세례, 교육, 구빈, 혼인, 성범죄, 고아·과부·병자·노인 보호 등을 포괄하는 ‘삶의 규칙’을 세웠다. 국가의 본질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물질적·제도적·상징적 준비를 갖추고 대비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중세 해석자 혁명에 의해 가능했다. . 


대혁명은 루터의 종교 ‘개혁’을 말한다. 그러나 사사키는 이 ‘개혁’이 세계를 통째로 뒤바꾸었으므로 ‘혁명’이라 불러도 좋다고 한다. 루터의 대혁명은 곧 ‘성서를 읽는 운동’이었다. 타락한 기독교 세계를 구하기 위해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고, 읽고 또 읽자고 제안했다. 대혁명 이후 100년만에 독일서 서적 간행 총수는 10배 이상 뛰었다. 


인류 역사의 ‘혁명’은 폭력이 아니라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고쳐 쓰는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하는 이 ‘문자 오타쿠’가 쓴 듯한 책은 정통 인문서로는 이례적으로 일본에서만 3만부가 나갔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번역돼 이현우(로쟈), 정혜윤, 복도훈 등 눈밝은 독서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현우는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 이후에 가장 나를 놀라게 한 일본인 저자의 책”이라고 평가했다. 


<이 치열한 무력을>은 2011년부터 사사키 아타루가 내고 있는 ‘아날렉타’ 시리즈의 4번째 권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성공 이후 사사키에게는 이곳 저곳에서의 강연, 대담, 기고 요청이 쏟아졌는데, 그것들을 묶어내고 있는 것이 아날렉타 시리즈다. 사사키는 골방에 틀어박혀 철학책만 파고드는 ‘샌님’이 아니다. 소설을 쓰고 힙합 음악의 작사도 한다. 책을 보면 사사키는 장소, 사람을 가리지 않는 듯하다. 문예평론가, 소설가, 모델, 예술가 등 다양한 사람과 만난다. 물론 때, 장소, 청중에 따라 말의 난이도와 어조는 조금씩 다르다. 패션지 독자에게는 헤겔 철학의 난점에 대해 정색하고 강의하기보다는 “더 잘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하나”와 같은 질문에 답을 한다. 


그래서 체계는 없다. 허나 때론 길고 어렵고, 때론 짧고 쉬운 글들이 저마다 지적으로 현란하다. 대화 형식이 많아 사사키 아타루라는 사람의 캐릭터도 잘 드러난다. 독선적으로 내지르다가도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내숭을 떤다. 현대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있고, 인류의 지성사에 대한 독특한 관점도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 발간된 책이라 ‘3·11 이후’에 대해서 논하는 대목도 있다. 아니, 사사키는 ‘이후’라는 인식을 부정한다. ‘이후’란 이미 재난이 끝났다는 판단에 기반한다. 하지만 후쿠시마 외에도 일본 곳곳에 원전이 있고, 한국에도 일본만큼 엉성하게 관리되는 원전이 많다. 사사키는 말한다. “우리는 대지진 아래에 있고, 재해 한복판에 있습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이후’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본발 방사능 ‘괴담’이 한국어 인터넷 공간에 떠들석하다. 정부와 ‘전문가’는 “안전하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고의 경력, 지위를 가진 전문가들이 완전히 상반되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누구는 일정량 이하의 피폭은 건강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고, 누구는 피폭에 있어서는 ‘일정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각자 자신의 양심과 지식에 어긋나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누구도 사태의 전모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제 원전이나 방사능에 대한 정보는 ‘믿음’의 영역에 속한다. 


원전 사고가 무서운 이유는 이것이 ‘완만한 죽음’을 부른다는 사실 때문이다. 3·11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여름 더위가 오고 겨울 비가 내린다. 일본은 경제의 활력을 되찾은데다가 올림픽까지 유치해 들떠있고, 한국의 원전도 고장과 작동을 반복하며 계속 돌아간다. 언젠가 죽는다해도, 그것이 방사능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죽음의 완만함’은 삶을 부식시킨다. 반원전 시위에 참여하기도 한 사사키는 위험이 사라지는데 10만년이 걸리는 핵폐기물을 인간이 관리해보겠다는 태도를 ‘오만’이라고 지적한다. 


“이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은 무력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안에 예술이든, 문학이든 무엇이든 넣어도 좋다. 그러나 사사키는 묻는다. 무력하지 않은 것이 있느냐고. 정치든, 인터넷이든, 시민사회든 모두 무력했고, 근래 수십 년간 전세계에서 실패를 거듭하는 미군도 무력하다. 애초에 ‘힘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무력하다고 쓸모 없는 건 아니다. 무력하지만 무의미하지도 않다. 유대인 파울 첼란은 나치의 수용소에서 ‘죽음의 줄’에 서있다가 보초가 한눈을 파는 틈을 타 ‘삶의 줄’로 옮겨 생명을 건졌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했다지만, 정작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첼란은 아도르노가 무색하게 시를 썼다. 목소리 높여 선동하지도, 과시적으로 절망하지도 않았다. 첼란의 시는 이 책의 제목처럼 ‘치열한 무력’이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핵심이었던 ‘책읽기의 급진성’이라는 논점도 다시 등장한다. 사사키는 미셸 푸코를 인용한다. “이론을 구성하는 것, 사유하는 것, 어떤 시점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실천”이라는 말이다.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면 이론은 야위고 실천은 헛돈다. 많은 이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재미없다”, “쓸모없다”고 내치지만, 이치로의 타격, 메시의 드리블의 메커니즘을 완벽히 이해하는 스포츠팬은 없다. 단지 “뭔지 모르지만 대단하다”고 말하면서도 즐긴다. 사사키는 오히려 “알기 쉬운 것이 사기”라고 말하는 패기를 보여준다. 


‘연애의 시작’이란 제목의 강연은 다수의 주목을 끌만하다. 물론 연애의 방법을 알려주는 글은 아니고, 연애 개념의 역사로 비춰본 현대 연애에 대한 통찰에 가깝다. 연애란 사실 12세기 유럽의 ‘발명품’이다. 전지(全知)의 존재, 스스로를 만끽하는 존재인 신이 왜 세계, 그리고 인간을 만들었을까. 답은 ‘사랑’밖에 없다. 신은 사랑하기 때문에 세계와 인간을 만들었다. 


12세기 이전까지 인간 사회에 사랑은 없었다. 육욕만이 있었을 뿐이다. 11세기 유럽에 음유시인이 나타나면서 오늘날의 사랑 개념 비슷한 것이 생겨났다. 시인들은 귀부인에게 헌신하며 순결을 바치는 기사의 이야기를 즐겨 불렀다. 신과 인간의 관계 비슷한 무엇이 귀부인과 기사 사이에 생긴 것이다. 


자유연애에 바탕한 결혼이 활성화되기까지는 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했다.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많은 남성들이 죽거나, 살았다 해도 정신적·신체적으로 부상을 입었다. 남아있던 계급 관념도 희박해졌다. 때마침 신생 예술인 영화가 자유연애에 대한 이야기들을 대중에게 퍼트렸다. 연애와 그로 인한 결혼은 서구는 물론 동양에서도 100년밖에 안된 새로운 제도인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다양한 형태로 연애 때문에 헤매는 사람들이 늘어난 이유”도 설명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연애는 환상인가. 이 환상은 파괴되어야 마땅한가. 니체는 말한다. “환상의 파괴가 즉시 진리의 창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거기에 나타나는 것은 무지, 진공, 황야다.” 연애는 환상이기에 종종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벗어날 수도 없다. 연애엔 정답이 없다. 


사사키는 비슷한 류의 질문에 줄줄이 답한다. 언제까지 ‘꾸미는’ 나로 존재해야 될까. 이 시대에 출산은 옳은 것인가. 책을 읽었는데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하나. 자원봉사를 하지 않는 건 죄인가. 사사키는 이 질문들에 때론 철학적 성찰에, 때론 상식에 근거해 답한다. 답을 요약하면 각각 “‘인정’이란 다른 사람이 부여하는 것이므로 항상 불안정하다.” “아이를 낳을지 말지는 스스로 결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음을 정하고 낳았다면 그게 어떤 시대이든 절대적으로 옳다.” “소설이든 철학서든 다른 사람이 쓴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는 것이 유일한 가치는 아니다.” “동조압력을 행동의 동기로 삼는 것은 건전하지 않다” 정도가 된다. 


아카데미를 벗어나 철학을 퍼트리며, 때론 대중의 ‘상담가’ 역할까지 자처한다는 점에서 사사키 아타루의 입지는 한국의 스타 철학자 강신주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강신주가 우직하고 직선적인데 비해, 사사키 아타루는 섬세하고 화려하다. 두뇌를 더 자극하는 것은 사사키다.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다. 일본의 사상가로 최근 크게 주목받고 있는 이라고 하는데,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저서로 보인다. 책의 제목은 파울 첼란의 <빛의 강박>에 실린 한 시구를 인용했다고 사사키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 


부제가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인데, 인류 역사의 혁명은 폭력이 아니라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고쳐 쓰는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사사키는 "우리는 혁명으로부터 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서구의 여섯 가지 혁명을 언급하는데, 이는 중세 해석자 혁명, 대혁명, 영국혁명,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이다. 그중에서도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논하는 것은 통상 '혁명'이라고 언급되지 않는 중세 해석자 혁명과 대혁명이다. 


먼저 대혁명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말한다. 그러나 루터의 '개혁'은 "세계 전체에 형태를 다시 주는 것"이었으므로 '혁명'이라고 번역해도 무리가 없다고 잇는다. 대혁명이란 곧 '성서를 읽는 운동'을 말하는데, 루터가 당시의 타락한 기독교를 구원하기 위해 성서를 읽고 또 읽고, 그것을 독일어로 번역해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힐 수 있게 함으로써 세계의 질서를 새롭게 세울 수 있었다.16세기 초까지 독일어 서적 간행 총수는 40종이었는데 루터와 그의 적대자들의 저술에 힘입어 1523년에는 498종에 이른다. 루터는 성서에 근거해 당시 세속 사회까지 지배하던 교회법까지 완전히 부정했다. 그래서 대혁명은 '법의 혁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함마드의 혁명이 이어진다. 40세의 평범한 남자 무함마드는 어느날 이상한 꿈을 꾼 뒤 메카 인근 히라 산의 동굴에 틀어박혀 명상을 하다가 대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을 만난다. 매우 현실적이게도, 무함마드는 자신이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미쳤다고 의심해 동굴에서 도망치는데, 아내의 격려에 용기를 얻어 다시 동굴을 찾는다. 지브릴은 무함마드에게 말한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 무함마드는 문맹이었음에도 말이다. 


루터의 '혁명'보다 생소한 것이 중세 해석자 혁명이다. 이는 '모든 유럽 혁명의 어머니'인 12세기의 법혁명을 뜻한다. 11세기말 피사의 도서관 구석에서 600년 가까이 잊혀졌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전 50권)이 발견된다. 이후 유럽은 그때까지 몰랐던 정치한 법 개념과 법률 용어를 입수한다. 사사키는 자신이 매우 크게 영향받은 피에르 르장드르를 인용해 국가의 본질은 폭력 기구 같은 것이 아닌, "아이를 낳아 기르는 물질적, 제도적, 상징적 준비를 갖추고 대비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방대한 법전을 해석한 중세 해석자들은 세례, 교육, 구빈, 혼인, 성범죄, 고아 과부 병자 노인의 보호 등을 통괄하는 '삶의 규칙'을 세웠다. "근대 국가의 원형은 이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성립한 중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있습니다."


사사키 아타루는 '문학'의 가능성을 믿는다. 이때의 문학이란 소설, 시 등의 좁은 의미가 아닌 글로 쓰여진 포괄적인 텍스트를 일컫는다. 그리고 '고작' 5000년 된 문학의 '종언'을 말하거나, '망했다'고 말하는 것은, 3만년~7만년 된 회화, 무용, 음악 등에 대해 할 소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멸망하리라고 믿는 종말론 역시 매우 유아적이고 유치한 발상이라고 일축한다.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문맹률은 90%였는데,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푸시킨 등은 나머지 10%를 상대로 승부해 이겼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쓰고 또 쓰는 것 뿐, 쓰지 않는다면 다른 할 일이라도 있느냐고 사사키는 쏘아붙인다. 



사사키 아타루('사상가'라는 직함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그러나 글을 읽으면 짐작이 가는 스타일)


그러므로 사사키 아타루에게 읽는다는 것은 엄중한 행위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저 글자를 훑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이다. 루터 또는 무함마드에게도 '읽다'는 것은 세계와 자신과 책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생생한 이물로서 타자성으로 분리되고 구별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 자신이 미쳤는가 아니면 세상이 미쳤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지독한 열광의 독서가이자 과도한 '문학'지상주의자인 사사키는, 아감벤에게는 "제발 부탁이니 사전 정도 찾아보는게 어떨까"라는 조롱을 던지고, 그 이름을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근대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한 가라타니 고진을 비판한다. "정보에 토실토실 살이 찌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비평가"와 "초라하게 자기 진영에 틀어박혀 비쩍 말라가는 전문가" 모두를 거부한다. "타락한 정보가 있는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라는 질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정보에 대해 무지하지만 텍스트를 정면으로 마주하는데는 자신감이 있음을 내비친다. 이 책은, 사사키 스스로의 표현을 원용하면 '벌거벗은 광기의 독서'를 권장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지나쳐 보이는 비장미가 부담스러울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독서의 자세, 나아가 세상을 대하는 자세를 되짚어볼 수 있는 계기는 마련해준다. 그러므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