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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를 위한 '마음의 습관'.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1)



지금까지 북섹션 프론트 페이지에 쓰기 위해 10권 가량의 책을 읽어왔는데, 그 중에서도 <사상으로서의 3.11>과 함께 가장 좋은 편에 속했다. 배운 것과 느낀 것이 고루 많아, 내 '마음'에도 영향을 줬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파커 J 파머 지음·김찬호 옮김/글항아리/328쪽/1만5000원

택시 기사는 민심의 풍향계다. 서민들의 생각을 알고 싶으면 택시 기사와 대화를 나누면 된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원제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을 보면 미국에서도 비슷한 모양이다. 그런데 사회운동가인 저자 파커 J 파머는 뉴욕에서 난폭한 택시에 올라타 기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또다른 생각을 이어갔다. 파머가 “이 직업을 얼마나 좋아하느냐”고 묻자 기사는 답했다. “글쎄요, 어떤 손님이 탈지 전혀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조금 위험하기는 해요. 하지만 많은 사람을 만날 수가 있어요. 대중을 알아야 해요. 거기에서 인생에 대해 많은 걸 배운답니다.”

택시 기사는 ‘공적인 삶의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위험한 취객이 탈 수도 있고, 범죄가 빈번한 지역을 지나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낯선 사람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안기지만, 사실 미국에서 폭력 범죄의 대부분은 낯선 사람이 아니라 지인에 의해 저질러진다. 우리는 자신 안의 어둠을 낯선 사람에게 투사할 뿐이다. 

오히려 기사는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으로 근거 없는 두려움을 상쇄시키고 있었다. 낯선 사람을 환대하면서 다양성이 안겨주는 긴장에 친숙해지고, 그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배움과 삶의 한 가지 통로로 받아들였다. 파머가 보기에 기사는 민주주의적인 ‘마음의 습관’을 계발, 연습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인류가 야만을 극복하기 위해 걸어온 오랜 여정 끝에 이뤄낸 성취다. 대개 민주주의는 ‘제도’의 문제로 파악되지만, 파머는 민주주의에서 ‘마음’의 문제를 제기한다.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성숙시킬 시민 개개인의 마음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달걀을 쌓은 듯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마음(heart)은 라틴어 ‘cor’에서 왔는데, 이는 감정만이 아니라 자아의 핵심을 가리킨다. 파머는 지식, 정서, 감각, 직관, 상상, 경험, 관계, 신체가 통합되는 중심부로서의 마음을 이야기한다. 수도, 전기, 철도가 국가의 인프라이듯이, 마음은 민주주의의 핵심 인프라다.  

그러므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말하는 정치서이자, 분노에 기반해 세몰이하는 정치꾼을 비판하는 사회비판서이며, 민주주의와 근원적 의미를 묻는 철학서인 동시, 저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신학서가 되고, 또 민주 시민이 되기 위한 수양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기계발서 역할도 한다. 

영국의 소설가 E M 포스터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두 가지 이유로 환호한다. 하나는 그것이 다양성을 허락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비판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면 충분하다. 세 가지도 필요 없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동반한다. 갈등이 없는 공공 영역은 ‘죽음이 없는 삶’과 같은 환상에 불과하다. 전체주의 사회에는 갈등이 보이지 않지만, 갈등은 사라지지 않고 지하로 쫓겨나 복귀를 노리는 중이다. 

프랑스의 젊은 귀족 알렉시스 드 토크빌(1805~1859)에게 건국 초기의 미국 민주주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왕의 칙령, 귀족의 결정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전통에 익숙한 프랑스인이 보기에 미국의 민주주의 정부는 갈등을 해결하는데 급급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이견이 빚어내는 긴장을 오랫동안 그리고 창조적으로 풀어냈다. 여기에 파머는 “긴장은 삶의 징표이고, 긴장의 종식은 죽음의 징표”라는 교훈을 잊지 말자고 제안한다. 나치의 ‘최종 해결’이 홀로코스트를 뜻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민주주의는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토론의 장을 제공한다. 그래서 시끄럽고 늦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비효율은 국가를 강하게 하는 인간적 다양성으로 상쇄되고도 남는다. “민주주의는 가장 능력 있는 정부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장 능력 있는 정부도 종종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민주주의는 해낸다.”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자아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사회가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기회를 이용해 민주주의적인 ‘마음의 습관’을 길려야 한다. ‘마음의 습관’이란 토크빌이 프랑스로 돌아가 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언급한 말이다. 토크빌은 세대를 이어 전승되는 ‘마음의 습관’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시 라틴어 어원을 따지면 ‘공적인’(public)이란 단어는 ‘사람들에 관련된’, ‘어른’, ‘사춘기’ 등의 단어에 연결된다. 반면 ‘사적인’(private)은 ‘박탈당한’이란 단어에서 파생됐다. 고대의 성인들은 ‘사적인’ 것을 무언가 박탈당한 상태로 여겼던 것이다. 공적인 삶을 통해 타인의 견해를 듣고, 자신의 견해와 긴장을 느끼고, 이를 창조적으로 해소하는 것이 민주 사회가 요구하는 시민의 모습, 그리고 ‘마음의 습관’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사생활’을 금과옥조로 여긴다. 미국은 물론이고 미국 문화의 영향력 아래 있는 한국도 그렇게 되는 중이다. 여럿이 모여 의견을 나눌 수 있었던 광장은 쇼핑센터가 됐고, 떠들석한 예술적 교감의 장이었던 극장은 개인용 컴퓨터, 스마트폰으로 대치됐다. 물론 인터넷 공간이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힘입어 아랍권에선 자스민 혁명이, 유럽과 미국에선 ‘점령하라’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인터넷이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을 기른다’고 단정해 말하는 것은 기술결정론이다. 디지털 미디어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정보의 생산자가 됐지만, 이렇게 생산된 정보가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다. 받아들인 정보에서 쭉정이를 추려내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인터넷은 민주주의의 적이 된다. 

파머는 공적인 삶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줄 두 가지 제도로 교육과 종교를 꼽는다. 한국의 제도로 따지면 총 12년을 보내는 초·중·고등학교 교실은 “우리가 시민으로 형성되거나 기형이 되는 결정적인 장소”다. 교사들은 각 과목의 ‘큰 이야기’를 학생이 자신의 ‘작은 이야기’와 연결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파머는 홀로코스트의 역사에 대해 배웠지만 자신의 삶과 연결하는 방법을 몰랐기에, 그 모든 사악함을 다른 행성의 이야기처럼 여기고 있었다는 경험담을 들려준다. 교실은 민주주의의 강령을 칠판에 적고 외우는 곳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를 몸으로 체득하는 곳이다. 

매우 자주 사회적 지탄을 받는 한국의 일부 대형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종교 공동체에서 민주적 마음의 습관을 배울 수 있다는 파머의 제안은 뜬금없게 들리기도 한다. 물론 파머 역시 종교적 열광이 각종 테러, 적대의 태반이 됐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태도를 간직하고 퍼뜨린 종교적 선각자가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영국 식민지 시절 미국의 퀘이커 교도였던 존 울만은 링컨보다도 앞서 노예를 해방시킨 주인공이다. 노예 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그때, 울만은 그것이 인간의 평등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어긋난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아직 깨닫지 못한 퀘이커 공동체 교우들을 20년간 성심으로 설득했다. 울만의 노력은 보답받았다. 퀘이커교는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80년 전에 노예를 해방시켰다. 

종교는 ‘연민’이다.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연민의 원리는 모든 종교적·윤리적·영적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다.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들을 대접하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파머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민주주의를 위해 교육, 종교 등 외부의 제도를 넘어 더욱 내밀한 공간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책은 영적인 깨달음 혹은 매우 깊숙한 자아성찰을 요구하는 경지에 이른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아침 신문에 실린 소식들이 닿지 않는 방, 또는 그런 시간이나 그런 날이 당신에게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방, 시간에서 세계의 흐름을 감지한 사례가 있다. 수도사이자 작가였던 토머스 머튼은 1944년 세상과 절연된 생활을 하기 위해 켄터키 주 숲속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1960년대 후반의 인종 갈등과 폭력을 예견했다. 그는 성서, 사회 비평, 흑인이 쓴 시를 읽고, 흑인 음악을 들었다. 수도원 주변의 완전한 침묵 속에서는 억압된 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생생하게 들렸다. 무엇보다 특권 있는 백인 남성으로서의 자신의 지위에 대해 성찰했다. 머튼은 예언자가 됐다.   

민주주의는 예전에 누군가 만들어놓은 뒤 저절로 작동중인 기계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깨어있는 시민의 헌신을 요구한다. 물론 어떤 말, 교육, 예술로도 설득이 되지 않는 부류들이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민주적 ‘마음의 습관’을 가진 60~70% 시민의 힘으로도 굴러간다. 파머는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말을 길게 인용하면서 책을 끝낸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생애 안에 성취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진실하거나 아름답거나 선한 것은 어느 것도 역사의 즉각적인 문맥 속에서 완전하게 이해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고결하다 해도 혼자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제도와 신념, 정치학과 신학의 결합이 여기서 시도된다.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쓰여졌으면서도 강하고 무거운 책이다.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 ‘우연히’ 태어났지만, 그 우연은 개인이 선택한 기자, 목수, 교사 등의 직업보다 훨씬 막중한 책무로 부여됐음을 깨닫게 한다. 총선을 앞두고 공천 과정에서 온갖 잡음이 나오고 있다. 물론 눈앞에 다가온 권력을 잡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민주공화국’에 사는 우리는 얼마나 민주적인가. 우리는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