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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넌 좋아하니, 난 아니란다, <롤리타> (2)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군대에서 읽었다. 지금은 절판된 민음사 판본도 아닌, 출판사와 역자가 기억나지 않는 야리꾸리한 판본이었다. 읽긴 읽었는데 뭘 읽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다가 검열 시간에 간부에게 책을 빼앗겼다. 표지에는 "예술인가 포르노인가" 운운하는 글귀가 쓰여져 있었던 것 같다. 


문학동네 판본을 입수한 김에 <롤리타>를 다시 읽었다.(여기에도 "에로티시즘 혹은 포르노그래피"라고 써있다!) 음...그러고 보니 난 <롤리타>를 읽은게 아니었다. 예전의 그런 번역으로는 <롤리타>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거다. 원문을 알 수는 없지만, 거의 매 페이지마다 번역자의 노고가 뚝뚝 묻어난다. 아마 예전에 읽은 그 번역은 문학동네 판본에 비하면 구글 번역기 수준이었을 것이다. 이런 소설을 읽을만한 한글로 바꾸어준 역자에게 감사한다. 




<롤리타>의 해외 어느 판본과 문학동네 판본.


<롤리타>는 '20세기 영문학 100선' 아니 '10선'을 꼽아도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 소설이다. 그렇게 잘 쓰여졌다고 평가받고, 나도 동의한다. 제정 러시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고급 교육을 받으며 고급 취향을 길렀고, 혁명 후 조국을 떠나 미국과 서유럽을 떠돌았으며, 영어로 자유롭게 소설을 쓸 정도로 언어에 뛰어났지만 평생 러시아어를 그리워한 이 작가는, <롤리타>에서 현란한 언어 유희를 선보이고, 기가 막히게 이죽대는 유머 감각을 발휘하고, 허물어지지 않는 소설 구성력을 보여주고, 무엇보다 희대의 캐릭터 험버트 험버트를 탄생시켰다. 이 험버트로 말할 것 같으면, 홍상수 영화 속 찌질한 남자들을 밋밋하고 순박하고 착해빠진, 그래서 어느 학교에서 3년을 다녔어도 누구도 그 존재를 모르는 투명인간 학생으로 만들어버릴 기세다. 


그래서 내가 <롤리타>를 좋아하느냐. 그렇겐 말 못하겠다. '잘 쓴' 소설이라고는 해도 '좋은' 소설이라고는 못하겠다. 우선, 난 <롤리타>의 문체가 전달하는 앞뒤 재지 않는 쾌락이 마음에 걸린다. 이런 쾌락을 즐겨도 되나 하는 괜한 느낌, 그러나 괜하지만은 않을 것 같은 그런 느낌. 비유하자면 <롤리타>의 문체는 1인당 15만원씩 하는 프랑스 디너 코스다. 엄청나게 비싸보이고 예쁜 식기에, 혀끝을 살살 만져대는 음식들이 조금씩 담겨, 아주 조용히, 끝없이 서빙되는데, 난 그런 음식을 즐기지 않는다는 거다. 내 음식 취향이 대단히 촌스럽다고 여긴 적은 없지만, 그래도 15만원짜리 디너 코스를 입맛 다시며 편한 마음으로 즐길 정도는 안된다. 


다음, 난 끝내 험버트 험버트란 인간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다시 홍상수 영화로 돌아오면, 그 영화들 속 남자들은 찌질하고 때로 나와  상관 없는 삶을 살고 있긴 해도, 어딘가 나의 한 조각을 간직한 듯 하다는 점을 완전히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험버트 험버트는, 그의 미성년 여성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라 해도, 그 야비하고 몰염치하고 극도로 찌질한 성격이 내게도 있다는 사실은, 누가 뭐라고 증거를 들이대도 부인하고 싶다. 게다가 난 이 험버트란 사람의 마음에도 '진심'이 있음을 끝내 설득하고 마는 나보코프의 솜씨가 더욱 얄밉고 심지어 무섭다. 


물론 나보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교훈적인 소설은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 <롤리타> 속에는 어떠한 도덕적 교훈도 없다." 나는 글을 읽을 줄 알던 순간부터 이런 문학관에 동의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이가 조금 든 지금에는 나보코프의 말에 무언가 덧붙이고 싶다. "도덕적 교훈은 없어도 된다. 하지만 독자를 '고양'시키긴 해야 한다." 


<롤리타>는 아무도 고양시키지 않는다. 대신 초콜릿을 녹인 끈적하고 달콤한 문장의 늪 속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어떤 독자는 그 늪 속에서 극도의 쾌락을 맛볼테지만, 난 싫다. 때마침 끈끈한 느낌도, 단 음식도 싫어하는 나이다. 물론 나도 늦은 오후 드립 커피를 곁들인 자허 도르테는 먹고 싶다. 하지만 자허 도르테같이 단 음식이 필요한 것은 하루 중 특정 시간대 뿐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나비 채집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처음 발견한 나비도 있어, '나보코프'라는 학명이 들어간 종도 있다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