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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럽의 로마, 아시아의 중국. <중국인 이야기1>


1966년 9월, 마오쩌둥, 린뱌오, 류사오치(왼쪽부터). 2인자 류사오치가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추기 직전이다. 파멸을 예감한 듯 표정이 좋지 않다. 


중국인 이야기1

김명호/한길사/548쪽/1만9000원


유럽에 로마가 있었다면 아시아엔 중국이 있었다. 로마는 4세기 무렵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갈라지면서 영향력이 쇠퇴했고, 지금도 이탈리아는 경제 위기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달랐다. 19세기 아편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 일본은 물론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1세기 들어서는 미국과 함께 세계 양강 체제를 구축하는 중이다.  


한길사는 1995년 1권이 나온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로 장안의 지가를 올린 출판사다. <로마인 이야기>는 2007년 15권으로 완간되기까지 총 350만 권이 판매됐다. 로마보다도 한국과 밀접했던 중국에 대한 대중적 역사교양서를 내려는 마음이 든 것도 당연하다.


필자 김명호씨는 경상대, 건국대 교수를 거쳐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40년 가까이 중국을 '연구 대상'이 아니라 '놀이터'로 삼은 이였다. 중국의 책·잡지·영화·새벽시장·음식점 등에 탐닉했으나 무언가 쓰려고 해본 적은 없었다. <중국인 이야기>는 그의 본격적인 첫 저서다. 


역사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대기식 서술 방식 대신, 인물 이야기로 풀어나갔다. 그래서 <중국인 이야기>는 중국 근·현대사를 다루지만, 시대 순서를 좇진 않는다. 문화대혁명이 나왔다가 국·공 합작을 다루다가 다시 닉슨의 방중을 그리는 식이다. 한길사 측은 "사마천의 '사기 열전'도 인물 중심의 서술 방식을 취한다"고 설명했다. 


<중국인 이야기>는 중국 현대사의 가장 큰 사건이자 상처인 문화대혁명(문혁)의 전조를 보여주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1955년 한 농민이 "참새들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탄원서를 중국공산당 중앙당에 보냈는데, 이에 대한 마오쩌둥의 대응이 문혁의 전조였다. 마오는 "12년 내에 전국의 쥐·참새·파리·모기를 소멸해야 한다"고 했고, 전국문화예술인연 주석 궈모뤄는 마오의 뜻을 재빨리 받아 "수천년 간 우리의 양식을 수탈하며 저질러온 죄악, 이제야 관계를 청산할 때가 왔다"며 참새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장했다. '참새 섬멸 총지휘부'가 신설됐고, 노동자, 농민, 당 간부, 학생, 군인이 동원돼 참새를 사냥했다. 그러나 이듬해 예년보다 훨씬 많은 해충이 들끓었다. 참새가 줄어들어 해충이 늘었다는 의견이 나온 뒤에야 참새는 복권됐다. 지금 보면 웃기지만 당시엔 진지했다.


이러한 역사의 희극에 농락된 이는 한 두 명이 아니었다. 마오쩌둥에 이은 2인자였던 국가주석 류사오치도 그 중 하나였다. 류사오치는 유연한 공산주의자였다. 공산주의 중국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자본가들 앞에서 "자본주의 시대의 착취는 봉건시대의 착취에 비해 진보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착취를 당해야 실업(失業)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착취유공론'이다. 


'경제건설'보다 '계급투쟁'을 강조한 마오쩌둥이 류사오치를 마음에 들어할 리 없었다. 마오는 류사오치에게서 스탈린이 죽자마자 그에 대한 격하운동을 벌인 흐루쇼프의 모습을 떠올렸다. 1966년 5월 4일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는 흐루쇼프 같은 자산계급의 대표자가 "우리 바로 옆에서 잠자고 있다"며 "이들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지시사항을 남겼다. 중국 공산당에서 흐루쇼프 같은 최고위급은 류사오치밖에 없었다.


초·중·고·대학생들이 "반당분자들을 타도하자"고 앞장섰고, 신문과 방송이 그들의 주장을 보도했다. 마오는 상하이, 항저우 등에서 잠행했다. 상황을 오판한 류사오치는 학생운동을 진압하려 했으나, 마오는 이를 빌미삼아 류사오치를 비판했다. 이후로 마오는 한 마디도 안했지만, 홍위병들이 알아서 다 했다. 국가주석은 청소부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나간 뒤, 은행의 대형금고에 연금된 채 세상을 떴다. 류사오치는 자녀들에게 "내가 죽으면 엥겔스처럼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라. 5대양을 떠돌며 전세계를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춤을 추는 중국인들. 문혁 시절의 흔한 풍경.  


장징궈와 그의 아버지 장제스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장제스는 소련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우리의 가장 큰 임무는 전 세계 무산계급의 해방"이라는 편지를 써보내며 장도를 축하했다. 반면 장징궈의 어머니는 "혁명인지 뭔지 하는 괴물이 남편을 물어가더니 이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잡으려 한다"고 한탄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반공주의를 선언하면서 부자 관계에도 문제가 생겼다. 16세 소년 장징궈는 자신을 찾아온 프라우다 기자에게 "그는 노동자들을 죽였다. 아버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장징궈는 소련 홍군에 입대했고, 소련의 공장과 농촌에서 힘겨운 노동을 했고, 아버지를 '반역자'라고 적은 입당원서를 내며 소련 공산당에 들어갔다. 


시대는 굽이치며 흘렀다. 장제스와 마오쩌둥 사이의 국·공합작이 성립됐다. 소련은 중국을 지원해 일본군이 소·만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로 장징궈를 불러 "귀국해서 국가와 민족의 해방을 위해 분투해라"고 말했다. 장제스 역시 부인 쑹메이링을 통해 아들의 귀국을 학수고대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장징궈는 여권, 차비가 없었고, 아내는 러시아인이었다. 주소련 중국대사 장틴푸는 자신을 찾아온 장징궈에게 "위원장(장제스)은 며느리의 국적 따위를 따질 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들이 12년만에 상하이에 돌아왔지만, 장제스는 선뜻 만나러 갈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일기장에 '인'(忍 )자만 써댔다. 결국 국민당 원로들이 "천륜의 즐거움을 거역하지 말라"고 말하자, 장제스는 못이기는 척 아들을 만나러갔다. 장징궈는 장씨 가문 법도를 따라 무릎을 꿇은 채 세 번 절했다. 훗날 장징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만의 총통을 지냈다.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외교와 병법은 능청스러웠다. 중국과 소련 사이의 불평등 조약이었던 '중·소 우호동맹조약'을 폐기하고 새 조약을 체결해야 했던 마오는 스탈린의 70회 생일을 맞아 모스크바행 열차에 올랐다. 하지만 마오가 조약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스탈린은 말을 돌렸다. 마오는 장기전에 돌입하기로 했다. 스탈린 생일 잔치가 끝나고 다른 나라의 외교 사절이 돌아간 뒤에도 마오는 귀국하지 않았다. "몸이 꺼져 잘 수 없다"며 소련이 마련한 최고급 침상을 들어낸 뒤 중국 대사관에 가서 나무 판때기를 가져오라고 했다. 방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고, 중국에서 들고온 화선지에 붓글씨만 써댔다. 스탈린은 "생일 축하하러 왔다는 사람이 볼일 끝났으면 가야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며 인상을 썼지만, 마오는 "지금 내게 주어진 임무는 세 가지밖에 없다. 밥 먹고, 잠자고, 똥오줌 만드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마오의 행방이 묘연하자 국제사회에선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서 연금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련은 마오에게 기자회견을 권했고, 이를 못이기는 척 받아들인 마오는 기자들 앞에서 '조약 체결' 이야기를 꺼냈다. 스탈린은 마오의 외교전에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1949년 12월 29일 밤 스탈린 생일 기념공연을 보는 마오쩌둥과 스탈린.


장제스가 공산당에 밀려 대만에 자리잡은 뒤, 대륙과 대만의 길목인 진먼다오(金門島)를 사이에 두고 중국인민해방군과 국민당 군 사이에는 격전이 오갔다. 그 와중에도 마오는 국민당 군과 함께 있는 미국 함정은 건드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명령내렸다. 미국이 공격해도 반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중국인들끼리 싸움"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오는 진먼다오를 점령하기를 원치도 않았다. 진먼다오를 점령하면 대만과 대륙의 거리가 너무 멀어져서 중국에서 완전히 분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양국은 79년 1월 1일 중국과 미국의 국교가 수립되는 날까지 빈 바다에 포를 쏘아댔다. 양국의 포격전은 '하나의 중국'임을 강조하는 동시, 외세가 두 나라의 관계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었다. 


김명호 교수는 수많은 희귀 사진을 모았고, 명사들의 일기, 회고록, 편지를 읽었다. 그 속에서 재미있는 구절들을 많이 인용했다. 사회주의 경제학자 첸자쥐가 류사오치의 언행을 본 뒤 자신의 '좌경유치병'을 반성했다든가, 조강지처와 사별한 명서예가 치궁이 재혼을 계속 마다한 뒤 "죽어서 집사람 만나 둘러댈 말 생각하다 보니 30년이 흘렀다"고 했다는 말이 적혀 있다. 중국을 극비리에 방문한 키신저는 미군 일부를 대만에 남겨두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저우런라이로부터 이를 보고받은 마오쩌둥은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면 꼬리가 가장 말썽이다. 대만 문제도 꼬리가 남아 있지만 그 정도라면 미국은 이미 원숭이가 아니다"라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1914년 7월 톈진 난카이대학 2학년 때의 저우언라이. 준수한 외모 덕에 톈진 어느 사진관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표현도 많다. 장제스에게 거의 유일하게 직언할 수 있었던 지식인 후스는 '민국 4대 미남'이라 불릴 정도로 잘생겨 수많은 여자친구와 연애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부인이 문맹인 덕분에 불화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문혁 이후 상황에 대해선 "험한 세상을 꾸역꾸역 살아온 까닭에 언제 뭐가 튀어나올지 몰랐다. 강물에 뛰어들고, 우물에 몸을 던지고, 수면제를 동전 모으듯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고 적었다. 중국 현대 예술가들을 설명하면서는 "중국의 20세기는 성공한 반역자들의 시대였다. 아주 없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전통 타령이나 해대는 사람들은 난세에 별 쓸모가 없었다"고 표현했다. 대만 천도 이후 미국의 군사지원, 경제원조를 받게 된 국민당 정권에 대해선 "엄마 젖이라면 모를까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미국은 쓰디쓴 과일들을 권하기 시작했다"고 썼다. 


<중국인 이야기>는 매년 2~3권씩 최소 8권 이상 나올 예정이다. 야심작답지 않게 기초적인 오·탈자와 비문이 자주 눈에 띈다는 점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