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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없는 사회

 필 주커먼 지음·김승욱 옮김/마음산책/368쪽/1만6000원


사회학자 필 주커먼이 고향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의 동네 은행에서 목격한 광경이다. 한 손님이 은행 간부 직원의 책상 앞에서 갚기 힘든 빚에 대해 상담하고 있었다. 직원은 손님에게 조언했다. “채무 자료를 모두 모으세요. 신용카드 청구서, 대출금 청구서, 대출 서류, 연체 통지서…. 그것들을 봉투에 넣은 뒤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세요. 그분은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시고, 빚을 없애주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계세요.” 직원은 매달 50달러씩 헌금을 내면 1년도 안돼 빚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게 해서 효과를 본 사람이 많다고도 덧붙였다. 은행 안의 누구도 이 ‘조언’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놀란 것은 주커먼 뿐이었다. 


주커먼의 전언을 들으면 지금 미국은 종교적 열정이 넘치는 나라다. 예수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스티커를 붙인 자동차가 세 대에 한 대꼴이며, 예배와 기도를 권고하는 광고판이 도심 곳곳에 서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속 목사들은 죄악에 물든 세상을 개탄하고 이교도를 저주한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단체들이 여전히 기세등등하다. 어느 경찰서장은 범죄율의 증가가 사탄 때문이라고 말했고, 어느 주지사는 자연재해에 기도로 대처하라고 호소했다. 이런 분위기니 조지 W. 부시가 기도로 하나님께 조언을 구한 끝에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했다고 당당하게 밝힌 것도 무리가 아니다. 


보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없는 사회는 부도덕, 사악함, 타락이 판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주커먼은 그들 주장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덴마크로 이주해 14개월을 살았다. 덴마크와 그 옆나라 스웨덴은 세상에서 종교의 힘이 가장 약한 나라에 속한다. 성경이 신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고, 교회 출석률 또한 세계 최저 수준이다. 


그렇다고 덴마크와 스웨덴에 악이 들끓고 있을까. 모두들 알다시피 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세계 최고의 복지 수준을 자랑한다. 기대 수명, 아동 복지, 국내총생산, 경제적 평등, 양성 평등, 정치가와 공무원의 청렴도, 범죄율 등 유엔이 내놓은 인간 개발 보고서의 여러 항목에서 최상위권이다. “믿음이 없어도 사람들은 건실한 법을 만들어 지킬 수 있고, 도덕과 윤리로 이루어진 합리적인 제도를 잘 따를 수 있다”는 것이 주커먼의 주장이다. 


주커먼은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 150여명에게 종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물었다. 일단 미국과 달리 스칸디나비아 국가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그래서 인터뷰 대상을 찾기가 어려웠고,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 대상자를 섭외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는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자신이 무신론자인 이유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한다. 


많은 종교학자들은 종교가 모든 인간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최종 문제, 즉 죽음에 대한 해답을 준다고 말한다. 신에 무심한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까. 77세의 라르스는 말했다. “옛날에 우리 생물 선생님은 항상 우리 몸을 구성하는 화학물질들의 가치가 덴마크 돈으로 4크로네 정도라면서 최대한 빨리 그 돈을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삶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나는 게 확실해요.”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라고 묻자 “나는 피할 수 없는 일은 걱정을 안하는 편이거든요”(55세의 킴),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90퍼센트 정도는 죽은 다음의 일 같은 걸 걱정하진 않을걸요. 먹고 살 돈을 버는 일, 가족을 먹이고 입히는 일을 걱정하죠”(25세의 요나스) 등의 답이 나왔다. 죽음을 눈 앞에 둔 75세의 레이프는 거의 영적인 느낌으로 말했다. “원래 그런 거니까.”


호스피스 간호사인 안네는 죽음을 마주한 수많은 사람을 경험했다. 안네가 일하는 병원에는 종교 없이 숨을 거두는 환자가 많지만, 기독교 신앙이 강한 노인도 몇 명 있다. 안네는 신앙인이 오히려 죽음을 힘들어한다고 전했다. “하나님이 자기를 천국에 받아들여주지 않을까봐 걱정하고, 자기 인생을 생각하면서 혹시 잘못한 일이 없는지”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인생의 무의미함을 견딜 수 없어 종교를 찾는다는 이론도 있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인간에게는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가 있으며, 종교가 바로 그 욕구를 다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달랐다. “사람들한테 정말로 의미가 필요한 것 같지 않아요. 자신의 의미는 자기가 만들어내는 거죠.”(39세의 티나) “삶의 의미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죽은 다음에 일어날 어떤 일을 기다리며 살면 안돼요.”(33세의 비베케) 주커먼은 “덴마크인과 스웨덴인은 삶에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삶을 마구 낭비해도 된다거나 소중히 여기지 않아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물론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무신론자’라고 내세우는 건 아니다. 아이들이 자라면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게 하고, 성인의 80% 이상은 교회세를 낸다. 마을 어귀 석조 교회의 건축미를 자랑스러워하고, 주일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칭하는 이들조차 성서가 하나님의 말을 그대로 적은 책이라든지, 예수가 처녀에게서 태어났고 죽은 뒤 부활했다든지, 내세가 있다든지 하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믿지 않았다.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고 가난한 자와 병자를 돌보고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스칸디나비아 기독교인이 말하는 기독교의 핵심이다. 


스칸디나비아에서 기독교는 초자연적인 것이 아닌 문화적인 것이다. 가족과 함께 쉴 수 있어서 부활절을 기다리고, 고대로부터 내려온 품위 있는 도덕, 가치관이 담겨 있어 성경을 긍정하고, 친구와 친척을 만날 수 있어서 세례식을 연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곳이 스칸디나비아 나라다. 


어쩌다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주커먼은 몇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먼저 ‘게으른 독점’ 이론이다. 한 사회에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어떤 종교도 국가의 특별한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즉 종교의 ‘자유 시장’이 있다면 각 종교는 살아남기 위한 마케팅 경쟁을 펼쳐야 한다. 그래서 신자들도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덴마크, 스웨덴에서는 수세기 동안 루터파 교회가 압도적인 지위를 누렸다. 이곳의 교회들은 힘겹게 신도를 불러모을 필요가 없었다. 


몇 가지 가설이 더 있다. ‘안전한 사회’ 이론은 “특정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안전에 확신이 없으면 종교에 더 가까워지는 경향”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살기 힘든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다고 말했는데 덴마크, 스웨덴은 살기 좋은 나라다. ‘일하는 여자들’ 이론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종교적이며, 남편과 아이들을 교회로 이끈 것은 대체로 여성이었다는 관찰에 근거한다. 그러나 다른 서구 사회에 비해서도 일하는 여성들의 비율이 높은 덴마크, 스웨덴에서는 ‘여성성의 탈경건화’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사회 전체가 세속화됐다는 것이다. 


물론 스칸디나비아 국가에도 마음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믿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다른 나라의 신자들처럼 종교적인 체험을 하고, 나쁜 일을 하면 지옥에 간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무리 열렬한 신앙인이라도 합리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40세의 도르테는 동성애가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난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건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기를 바랐기 때문이며, 남자와 여자는 결합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도르테는 “내 종교적 신념으로는 그게(동성애)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회적 측면에서는 그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접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커먼은 신이 없이도 행복한 스칸디나비아 사회를 통해 신이 넘치지만 불행한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약자를 돕고, 자비와 자선을 행하고, 개인보다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는 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가장 성공적으로 제도화해 실천하는 곳은 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스칸디나비아 국가라는 아이러니를 전한다. <신 없는 사회>를 추천한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명예교수(비교종교학)는 “어느 사회나 건실한 사회로 자라나려면 맹목적인 근본주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현재 표층적인 근본주의적 신앙이 창궐하고 있는 한국 사회도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길거리와 지하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무리들이 자족적 고성방가를 일삼더니,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던 이가 대통령이 돼 조찬기도회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이는 세상이 됐다. 특정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서로 밀고 끌어주면서 국가 권력을 장악했다는 민망한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37세의 회사원 모르텐은 “종교를 믿는 거야 상관없지만, 나라를 다스리면서 종교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아주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어”라고, 39세의 검사 크리스티안은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지만, 그냥 혼자 해라”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