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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찬란한 날은 지났다 <더 지니어스: 블랙 가넷>를 보며




요즘 내가 챙겨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EPL 첼시 경기, 아내는 tvN의 <더 지니어스: 블랙 가넷> 뿐이다. 아내가 볼 때 함께 <더 지니어스: 블랙 가넷>를 보곤 하는데, 최근 두 차례의 방영분은 꽤 인상 깊었다. 


이 프로그램은 매번 규칙이 복잡한 게임을 제시한 뒤 출연자들을 하나씩 탈락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최종 탈락자를 정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2명이 데스 매치를 벌인다. 매번 나오는 게임의 규칙이 복잡해, 나같은 시청자는 설명을 듣고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참가자들도 게임의 핵심을 신속히 파악해 플레이하는 것이 관건이다. 물론 게임의 규칙을 잘 이해한다고 이기는 건 아니다. 여러 사람이 참여하기에 편을 먹거나 견제하거나 속이는 심리전이 벌어진다. 명석한 두뇌, 강한 정신력, 다른 사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친화력 혹은 카리스마를 두루 갖춰야 게임에 유리하다. 


젊은 여성 참가자 2명이 있었다. 아나운서 신아영과 배우 하연주다. 신아영은 하버드대 출신이고, 하연주는 멘사 회원이다. 그러나 둘은 여러 회차를 거듭해도 게임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했다. 남자 출연자들은 굳이 여성 출연자를 지목해 떨어뜨리지 않는 '신사도'를 발휘했다. 그러나 신사도도 초중반 뿐이다. 후반부로 가면 이 여성 출연자들도 어차피 탈락의 운명을 맞이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연주는 마지막 남은 5명 중 홍일점이었다. 데스 매치를 벌여야 했던 프로 포커 플레이어 김유현은 자신의 상대로 하연주를 지목했다.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기 위해선 가장 약한 사람을 골라 대결해야했고, 참가자는 물론 시청자도 하연주가 그 대상이 되리라 쉽게 예상했다. 게다가 게임은 김유현이 바로 직전 회차에서 또다른 여성 참가자 신아영을 손쉽게 이긴 '기억의 미로'였다. 누구나 김유현이 이길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때 반전이 일어났다. 하연주는 보는 사람이 "쟤 왜 저래?" 할 정도로 이상한 수를 써 김유현을 혼란에 빠뜨렸다. 김유현은 당황했고 스스로 무너졌다. 스튜디오를 떠날 준비를 해야할 것으로 여겨지던 약자의 숨은 한 방이었다. 



하연주, sks 꽃병풍




다음회인 10화에서 하연주는 다시 장동민과 데스 매치를 벌였다. 이날 장동민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정신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데스 매치를 하면서도 게임의 규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악수를 두었고, 하연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장군'을 불렀다. 탈락이 확실시되던 장동민은 말도 안되는 한 수를 던졌다.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이 "내 밑에 헬리콥터가 대기중이다"라고 외치는 꼴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그런 허풍에 개의치 않고 게임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하연주는 생각했다. 저 수는 엄청난 묘수가 아닐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임의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닐까. 장동민은 <더 지니어스>가 진행되는 내내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결국 하연주는 장동민의 허풍에 말려 악수를 두었고, 장동민은 바로 다음 턴에 게임을 끝냈다. 


하연주는 인터뷰에서 울면서 말했다. "스스로를 못 믿은 것 같아요." 자신의 능력을 믿었다면, 그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임을 확신했다면, 하연주는 2회 연속 이변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과대평가, 자신에 대한 과소평가가 패배를 불렀다. 과대평가와 과소평가 중 요즘 사람들의 경향이 어디에 치우쳐 있는지 알 길은 없다. 일견 과대평가자들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목소리 큰 사람이 시선을 끈다는 세상 이치를 생각해보면 스스로를 못믿는 사람도 그만큼 많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아는 것은 어렵고도 중요하다. 


11회에는 한의사 최연승이 카이스트 학생 오현민과 데스 매치를 벌였다. 최연승은 메인 게임에서 강한 모습은 보이지 못했으나, 정신의 회복탄력성이 좋아 쉽게 탈락하지 않는 참가자였다. 반면 출연자 중 나이가 가장 어린 오현민은 매번 게임의 핵심을 즉각에 파악하는 영민함을 보였다. 이날 데스 매치에서도 오현민은 압도적인 게임 이해력으로 최연승을 쉽게 눌렀다. 


최연승은 탈락 후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도 현민이처럼 당당한 나날이 있었는데 하필 그런게 사라져가는 시점에 지니어스에 출연했어요. 평범함으로 비범함을 이기려 했지만 그러지 못해 아쉽네요." 




학생 오현민(위), 사회인 최연승 



최연승은 과학고 출신에 한의대에 진학해 강남에 한의원을 열었다. 세속적 기준에서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평범함' 운운하는 건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교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먹고 살 걱정 없는 수백억 대 자산가라도 재벌 옆에 서면 움추러든다. 게다가 최연승은 30대에 접어들었다. 그에겐 20대 초반으로 절정의 비상한 두뇌를 자랑하는 오현민이 대단해 보였을 것이다. 


하연주의 발언이 교훈적이었다면, 최연승의 발언은 감성적이다. 누구나 지적, 육체적으로 찬란한 시기를 갖는다. 슬프게도, 대부분은 자신이 찬란하다는 사실을 모른채 그 시기를 넘긴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바로 그때가 자신의 절정기였음을 알아채지만 때는 늦었다. 


물론 세월이 주는 선물도 적지 않다. 관계에 대한 적응력, 상황에 대한 이해력, 자기 조절 능력 등은 세월이 흘러 많은 경험을 한 뒤에야 얻을 수 있는 능력들이다. 최연승은 이런 능력으로 게임에 이기려 했지만 실패했다. 슬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또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힘 역시 세월이 주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