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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계가족'의 탄생. <장거리 사랑>

장거리 사랑

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지음, 이재원·홍찬숙 옮김/새물결/359쪽/1만8000원


둘이 사랑하고 결혼하고 출산해 가정을 꾸려나간다. 이것이 현대 서구 사회의 전형적 핵가족의 발달 단계다. 전통적 가치관이 강한 아시아, 남미 지역이라면 ‘둘’의 결정에 부모, 친척 등 가족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부모의 반대에 결혼을 망설이는 연인은 아직도 한국 드라마의 흔한 소재다. 


그것 뿐일까. 조금만 더 생각하면 그럴리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이미 지역 사회, 국가, 민족을 넘어 전지구적으로 엮여 있다. 내 통장의 잔액은 중동 지역의 정세에 연동되고, 내 점심 식사의 메뉴는 남미를 흔든 기상 이변에 영향 받는다. 경제, 정치, 문화가 세계와 함께 움직이는데, 가정이라고 다를까. 세계는 이미 우리 집 안방에 자리했다. 


‘위험사회’ 개념으로 유명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과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은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1990)에서 현대 사회의 사랑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현대 세계는 어제와 오늘이 다를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벡 부부는 22년 전의 분석이 “서구라는 역사적·문화적·정치적·법적 조건 아래 형성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한다. 게다가 주제도 동성 혹은 이성 간의 사랑, 그들의 아이라는 ‘협소한 주제’에 매여 있었다고 인정한다. 이제 시야를 넓혀 ‘사랑의 지구화’라는 넓은 주제를 살필 시간이다.


기존의 ‘정상가족’은 공동의 장소에서 얼굴을 마주하면서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 이 가족 개념은 오랜 세월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제 국가, 종교, 문화, 인종의 경계를 넘어 함께 사는 ‘세계가족’을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익숙한 것이 흔들리는데는 혼란이 따른다. 하물며 그것이 사랑, 가족 등 사적 영역으로 여겨져온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현재의 세계는 경제·문화·정치적 불평등으로 ‘울툴불퉁’하기에, 세계의 모순이 틈입한 가정 역시 울퉁불퉁해진다. 세계가족이 “중국 문학과 프랑스의 요리 문화, 아프리카 예술에 조예가 깊은 고상한 교양시민계급”, 즉 코스모폴리탄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 익숙하지도 열려있지도 않은 사람들이라는 점이 혼란을 가중시킨다.


공동의 장소, 언어, 국적을 벗어나는 ‘장거리 사랑’은 현대 사회의 여러가지 변화들로 인해 가능하다. 평생을 같은 지역에서 나고 자라 죽어야했던 근대 이전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현대인들은 세계 어느 곳이든 쉽게 오가거나 정보를 주고 받는다. 갓 잠을 깬 한국의 여성이 스마트폰으로 청량한 가을 아침 사진을 찍은 뒤 이를 아르헨티나 남성의 저녁 식탁으로 보내줄 수 있다. 게다가 장거리 사랑에는 ‘일상’이 삭제돼 있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면서 남자가 함부로 벗어놓은 양말에, 여자가 먹다 흘린 음식 찌꺼기에 기분이 상할 일이 없다. 즉 “장거리 사랑은 침대 시트를 빨지 않는 섹스, 설거지 없는 식사, 땀과 관절의 통증이 없는 등산과 같다.”


장거리 사랑은 연인 사이에만 허용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아이의 사랑도 국경을 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기러기 아빠, 필리핀의 가사 도우미 노동자들은 대륙을 넘어간 자식들에게 애절한 사랑의 신호를 보낸다. 오늘의 헤어짐은 내일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위로하면서, 송금과 국제전화, e메일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한다. 


세계가족은 지리적 거리 뿐 아니라 문화적 거리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같은 집에 사는 가족 구성원이지만 각기 다른 문화적·인종적 배경을 갖고 있기에 각자 다른 경험,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 신부는 한국산 식품으로 밥상을 차렸지만, 가족들은 숟가락을 재게 놀리지 않는다. 성에 대해 보수적인 문화권에서 온 여성과 개방적인 문화권 남성이 데이트를 할 때, 작은 언어, 행동 때문에 파국이 일어날 수도 있다. 



<장거리 사랑>의 독어본을 두고 인터뷰를 하는 듯한 모습의 벡 부부. 표지의 동양 여성 모델은 누구?


저자들은 특히 여성의 이주에 따른 세계가족 구성을 분석하는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여성의 이주는 크게 보면 결혼을 위한 이주와 가사노동을 위한 이주로 나눌 수 있다. 두 양상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르다. 먼저 가난한 나라 여성이 결혼 중개 회사, 인터넷 등을 통해 부유한 나라 남성에게 시집가는 결혼이주는 “지구적 불평등이라는 중력을 어떻게 개인적으로 좌절시킬 수 있는지, 즉 어떻게 그러한 중력을 극복하고 상승할 수 있는지에 관한 조언에 따라 이루어진다.” 대개 결혼이주는 ‘결혼은 두 남녀의 낭만적 사랑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는 근대 이후 사랑과 결혼의 이상에 도전하는 것이기에 어딘지 불편하게 여겨진다. 게다가 미디어는 결혼이주여성의 비극적 삶을 종종 다루면서 이러한 고정관념을 강화시킨다. 미디어와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은 결혼이주여성을 ‘희생자’이며, 현실에 ‘거짓 만족’하는 이로 그리곤 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서구인들이 중시하는 ‘애정에 의한 결혼’과 결혼이주가 보여주는 ‘목적을 위한 결혼’의 구분이 생각만큼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서구인들은 낭만적 사랑을 결혼의 이상으로 삼지만, 사실 낭만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일차적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정한 성격, 재치, 재산, 학력 등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비춰질만한 자질은 사실 그의 사회적 배경에 의해 취득된 것이다. “낭만적 사랑은 신분에 맞는 사람의 반경 안에 머무른다.”


결혼이주여성이 낭만을 느끼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다. 러시아와 독일 사이의 결혼중개를 다룬 다큐멘터리 <결혼 의사가 확실함>에 등장하는 몇몇 러시아 여성은 독일 남성의 미덕을 찬양했다. 독일 남자들은 정직하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낭만은 이러한 환상에서 싹튼다. 그러므로 저자들은 결혼이주여성들을 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만 볼 것이 아니며, 결혼이주를 처음부터 ‘위장결혼’이라고 의심할 이유도 없다고 말한다. 


반면 가사노동이주에 대해서 저자들은 안타까움을 표한다. 서구 사회에 양성평등의 가치가 확산되면서,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로 여겨졌던 가사노동에 남성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나 남성의 가사노동 참여는 아직 완벽하지 않다. 마음은 있지만 몸이 굼뜨다. 그런 와중에 여성들은 직장에서 새 자아를 찾는다. 여성이 빠지고 남성이 들어오지 않은 가사노동의 공백은 ‘지구적 타자’, 즉 제3세계의 가사노동 이주여성이 메운다. 많이 일하고 덜 받는 이주여성을 고용하면서 제1세계의 남성과 여성은 ‘침묵의 동맹’을 맺는다. 


문제는 이주여성의 고향에서 일어난다. 필리핀에서는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900만명이 돈을 벌러 해외에 나갔고, 그중 다수가 자녀가 있는 여성이다. 루마니아에는 외국에서 일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이 35만명에 이른다. 남겨진 아이들을 지칭하는 ‘EU-고아’ 개념이 생긴 것은 이 때문이다. 폴란드 여성이 독일로 떠난 자리는 우크라이나 여성이 채운다. 이른바 ‘돌봄의 지구적 연쇄’다. “어머니 역할이 민족이나 인종, 계층의 사회적 위계질서 속에서 자기보다 아래에 놓인 여성에게 맡겨진다.” 즉, 우크라이나 아이들이 힘들어진다는 이야기다. 


가사노동 이주여성의 입장도 난처하다. 돈은 은행을 통해 보내지만, 모성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고향에 남겨진 아이들은 엄마가 자기 대신 미국, 독일, 한국의 어느 아이를 보살펴준다는 생각에 서운함을 느낀다. 이주여성은 고향으로 전해지지 않은 모성을 현재 맡고 있는 아이에게 쏟지만, 그것은 아이의 원래 부모가 불편해할 정도를 넘어서는 안된다. “가난한 지역의 아이들에게서 떼어내져 부유한 사람들의 아이들에게 사용”되는 모성애를 저자들은 ‘지구적 심장이식’이라고 부른다. 


여성의 이주에 따른 부수적 효과가 있다. 전통 사회가 유지해온 남성 중심의 권력 질서가 해체되는 것이다. 비서구 여성들은 서구 사회로 이주해 더 많은 자유를 경험한다. 스웨덴의 이란 출신 이주자들에게 이란의 정치 체제가 변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냐고 물었더니 남성들은 대부분 돌아가겠다고 한 반면, 여성들은 대부분 돌아가지 않겠다고 답했다. 이란의 가부장제 질서가 애써 얻은 자유를 모조리 앗아갈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돈이 있으면 권력도 있다. 이주여성은 고향에 송금하는 돈으로 고향에서의 권력 상승을 경험한다. 제3세계에서 여성의 이주는 일종의 ‘사회적 성공’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발언권이 세진다. 여기에서 패배자는 고향의 남성이다. 



닮았네.


가사노동 이주여성의 모성이 뒤틀린 형태로 퍼지는 것은 오히려 단순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복잡한 이야기는 따로 있다. 수천년 동안 인간으로서는 간섭할 수 없는 ‘인류학적 상수’로 여겨져온 출산도 이제는 분업화의 시대를 맞고 있다. 1만2000~2만 달러만 있으면 인도에서 대리모를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다. 이탈리아 여성의 난자, 그리스 남성의 정자로 인도 여성의 자궁에서 길러진 ‘내 아기’를 맞이할 수 있다. 여기서 모성 역시 일자리처럼 ‘아웃소싱’해도 되는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전지구적 불평등의 문제는 임신, 출산, 모성과 같은 원초적인 이슈에 대한 판단까지 혼돈으로 몰아넣고 있다. 


저자들은 말한다. “오늘날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려면 단지 사랑에 대해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와 함께 자아, 국경, 세계가 사랑과 어떻게 상호침투하고 겹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저자들은 장거리 사랑, 세계가족의 등장에 대해 간혹 비판적이지만, 대체로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듯 하다. 옮긴이가 후기에서 지적한대로 <위험사회>에서 보여준 “단호한 문명비판의 자세”는 이번 저작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사랑을 알기도 힘든데, 사랑을 하기 위해서 세계까지 알아야 한다니 힘에 부친다는 이가 적지 않을 듯하다. 그래도 이런 글귀는 근사하다. “밑에서 볼 때는 개인들에게 전례없는 일회적인 사건으로 보이는 것이, 위에서 보게 되면 시대적 변화의 시작일 수 있다.” 이제 ‘나’는 ‘세계’에, 세계는 나에게 그 어느때보다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