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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하고 싶은 것과 보여주고 싶은 것, 스파이 브릿지



**스포일러 조금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는 마치 두 편의 영화를 이어붙인 듯 보인다. 스필버그답지 않게 그 이음새가 어색하다는 느낌도 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1957년을 배경으로, 보험전문 변호사 제임스 도노반이 소련 스파이 혐의를 받고 있는 루돌프 아벨의 변호를 맡아 법정 공방을 벌이는 대목이 전반부, 선고 이후 수감생활중인 아벨과 소련 상공에서 스파이 촬영을 하다가 불시착해 붙잡힌 미군 파일럿을 교환하기 위한 협상 대목이 후반부다. 전반부는 법정 영화의 틀을 따라가고, 후반부는 냉전 시대 스파이 영화의 형태를 보인다. 


스필버그가 '하고 싶은 말'은 전반부에 응축돼 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교실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한 뒤 핵전쟁 비디오를 감상하는 시대다. 미국은 핵전쟁에 대한 공포와 이를 촉발할지 모를 적국 소련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영화 속엔 안나오지만, 소련도 미국에 대해 마찬가지 감정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벨을 대하는 미국 사회의 시선은 차가움을 넘어 잔득 가시가 돋혀있다. 아벨이 조만간 전개될지 모를 핵전쟁의 불씨라도 되는양 본다. 심지어 판사조차 피고에 대한 예단을 서슴 없이 드러내며, 빨갱이 재판 같은 거 빨리 끝내자는 식으로 나온다. 하지만 변호사 도노반은 다르다. 그는 의도치 않게 아벨의 변호를 맡았으나, 아벨과 자신을 향한 사회의 시선엔 아랑곳 않고 최선을 다해 변론한다. 도노반은 아벨이 비록 스파이일지언정 미국의 건국 정신, 헌법에 맞게 존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오히려 도노반은 아벨이 미국으로의 전향을 거부한 채 자신의 조국에 충실했으니, 훌륭한 군인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벨을 규범과 절차에 따라 정당하게 대우하는 것이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미국의 우위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설득한다. 하지만 눈 먼 시대에 눈 뜬 자의 목소리가 들릴리 없다. 도노반은 심지어 변호를 주선한 동료들로부터도 싸늘한 시선을 받고, 도노반의 가족에게는 백색 테러가 가해진다. 포커페이스의 간첩 아벨은 도노반을 "오뚝이 같은 남자"(standing man)이라고 부른다. 스필버그는 적개심에 가득찬 대중, 목적을 위해선 부당한 수단을 써도 된다고 믿는 국가와 사법기관의 포위망 한가운데서도 마음 속 가치, 직업인으로서의 신념을 꿋꿋이 섬기는 남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미국에서 그런 남자는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에 잠깐 나온 뒤 사라진 것 같지만, 스필버그는 고색창연한 미국 민주주의의 신념을 다시 한번 칭송한다. 이런 '민주주의의 '슈퍼맨'을 스크린으로 소환할 할리우드 감독은 스필버그밖에 없다. (스필버그가 할리우드의 리버럴을 대표한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보수를 대표할텐데, 이스트우드가 이런 식의 민주주의 영웅을 그려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스트우드의 주인공은 법이나 민주주의 정신보다는 약자에 대한 부조, 공통점 없는 개인들의 연대 같은 개인적 가치에 의지해 미국을 지켜나간다.)




<스파이 브릿지>의 전반부(위)와 후반부(아래). 소련 스파이 아벨 역의 마크 라일언스(위 사진 가운데)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노미네이트가 확실한 명연을 펼쳤다. 잘 알려지지 않은 좋으 배우가 끝없이 등장하는 것도 할리우드 영화의 강점이다. 


스필버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후반부에 나온다. 지난 여름의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이 냉전시대 스파이영화의 흔적을 곳곳에 심어놨듯이, 이제 확연히 과거의 일이 된 냉전은 돌고돌아 할리우드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중국과 다투는 마당이니, 소련과의 대결이란 그저 향수 이외엔 아무 것도 아니다. 스필버그는 동과 서를 가르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는 역사의 현장으로 관객을 안내한 뒤, 음험한 소련, 촐싹대는 동독, 비정한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도노반의 모습을 그려낸다. 총격전 같은 것은 없지만, 유치하지만 까다로운 협상 파트너를 상대로 '해피엔딩'을 이끌어내려는 도노반의 협상은 또다른 의미의 첩보전이다. 후반부의 도노반은 전반부처럼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행세하기보다는, 배짱과 수완을 두루 갖춘 협상가의 면모를 보인다. 춥고 어두운 곳에서 고초를 겪은 도노반이 따뜻하고 밝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쓰러져 잠이 드는 마지막 장면의 평화엔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