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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디언의 김영삼 오비추어리



(아마도) 오랜만에 가디언 오비추어리에 한국인이 올라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가디언 오비추어리는 냉정하고 정확하기로 정평났다. 오랜만에 모르는거 건너뛰면서 대충 번역해봤다. 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시류에 휩쓸린거 같다. 원문은 여기. 



대담한 양 김씨(이 성은 한반도에서 가장 흔하다)는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남한을 지배한 군부 독재자에 맞선 투쟁에 앞장섰다. 더 유명한 김대중은 북한 지도자 김정일과의 첫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연 뒤인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북한을 건국한 독재자 김일성이 갑자기 죽지 않았다면, 그 상은 87세로 사망한 김영삼에게 돌아갔을지 모른다. 한국인들이 칭하는바를 따르자면, YS는 DJ같은 국제적 유명세는 없었지만 1993년 대통령에 선출됐다. 두 김씨가 협력했다면, 그들이 용감히 쟁취하려했던 민주주의는 좀 더 빨리 다가왔을 것이다. 둘은 DJ가 병상에 있던 2009년에야 화해했다. 


김영삼은 부유한 어부 김홍조와 그의 아내 박부련의 사이에서 6남매의 맏이로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졸업 직후 정계에 투신했다. 그는 1954년 2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는데, 이는 최연소 기록이었다.그는 9번이나 당선되는 기록을 세웠다. 급진적이진 않았지만 확고한 자세로 민주주의에 투신한 그는 이승만(1960년까지 재임), 박정희(1961~79), 전두환(1980~88) 등 세 대통령의 독재적 움직임에 단호히 대항했다. 이들 중 둘은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 


1960년 무장공비가 김영삼의 모친을 살해했다. 누구도 김대중에게 한 것처럼, 김영삼을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었다. 김대중의 지역적 기반은 정치적으로 소외된 남서부의 전라도였고, 김영삼은 정치군인들의 고향이기도 한 부유하고 인구 많은 경상도 출생이다. 이들은 호적수가 됐다. 1979년 박정희는 김영삼이 가발공장에서 해고된 후 경찰에게 구타당한 노동자들을 보호했다는 이유로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했다. 폭동이 일어났고, 권력집단 내부에서도 경고음이 울렸다. 박정희의 정보부장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박정희를 쏘아 죽였다. 또다른 쿠데타가 일어나 전두환이 권력을 잡았다. 1983년, 김영삼은 26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을 하면서 격렬히 저항했고, 끝내 강제 급식을 당하기도 했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국가장 영결식이 국회의사당에서 엄수된 26일 김수환 전 국회의장이 추도사를 마친 뒤 분향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전두환은 1987년 타월을 던졌다. 하지만 양 김씨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둘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사이, 승리는 전두환의 동료이자 장군에서 민주주의자로 변신한 노태우에게 돌아갔다. 1990년 김영삼은 많은 이들을 실망시키며 노태우의 집단에 합류했고, 이로서 보수층과 경상도의 표를 모아 1992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의 5년 재임기는 복합적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재벌이라 불리는 가족 경영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검은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로 인해 전두환, 노태우는 구속된 뒤 쿠데타에 대한 처벌까지 받았다. 그들이 수의를 입은 채 풀죽은 모습은 카타르시스를 줬다. 또 김영삼은 의심스러운 장교들의 모임을 해체시켰고, 이로 인해 남한은 군인들이 자연스럽게 막사로 돌아가 군부 독재 이후 아시아 민주주의를 이룩한 나라가 됐다. 더 이상의 쿠데타는 불가능했다. 


변경의 1994년은 중요한 한해였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의심이 이는 가운데, 빌 클린턴은 영변 원전 지역을 폭격하려는 계획을 꺼내들었다. 김영삼은 자서전에서 클린턴을 만류했다고 주장했다. 지미 카터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에게 남북 정상회담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한 뒤 위기는 사라졌다. 마침 '위대한 지도자'가 죽었고, 김영삼은 군대에 최고 경계령을 내렸다. 비판자들은 김영삼이 조의를 표하거나 장례식에 참석했다면 남북 관계는 후진이 아니라 전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김영삼의 아킬레스건은 경제였다. 그는 1993년 가명으로 된 은행계좌를 금지하는 극적인 조치를 취했는데, 이런 계좌는 검은돈을 가능케한 주원인이었다.1996년 OECD 가입은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다만 '요새 한국'은 부자 나라들의 클럽은 특권 뿐 아니라 시장 개방과 같은 의무도 진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1년 뒤, 김영삼은 아시아 금융 위기가 깊어감에 따라 몰려오는 빚더미와 위기 국면을 막기는커녕 이해하지도 못했다. 결국 1997년 12월 당시까지 IMF 최대의 구제금융으로 인해 간신히 국가 부도를 면하는 상황을 맞았다. 같은 달 아슬아슬하게 당선된 김대중은 과격한 구조조정으로 뒷수습을 해야했다.


김영삼의 또다른 오명은 그의 아들중 하나가 뇌물수수죄로 교도소에 갔다는 점이다. 나중에 김대중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로널드 레이건처럼, 양 김씨의 회색 머리는 집권 이후엔 눈에 띠게 검어졌다. 한국의 코미디언들은 대통령직에 회춘의 힘이 있다고 언급했다. 


퇴임 이후 김영삼은 별 관심을 받지 못했고, 건강도 나빴다. 유족으로는 1951년 결혼한 아내 손명순과 다섯 명의 자녀, 5명의 여동생이 있다. 


정치인 김영삼, 1927년 12월 20일 태어나 2015년 11월 22일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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