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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계단,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교통약자의 경우

닥쳐보지 않으면 몰라서 인간은 아둔하다. 전세를 살아본 적이 없으니 전세값 오른다는 아우성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소 돼지를 먹기만 했지 동물의 입장이란건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덮어놓고 생매장하고 보는거다. 권력 없는 인간이 역지사지 못해도 가끔 민페를 주는 마당에, 다른 사람, 동물, 식물 생각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인간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으니 살기가 힘겹다.

예전에 장애인들끼리의 좌담회를 취재한 적이 있는데, 이동권 이야기를 하다가 지하철 동대문운동장 역이 화제로 올랐다. 난 그 역에서 5호선, 2호선, 4호선 등을 갈아타면서도 환승 구간이 좀 길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을 했다. 그런데 장애인 입장에서는 그 역에서 환승하는데 30분이 걸린다는 얘기였다. 깜짝 놀랐고, 이후로 그 역을 지나치면서 장애인이 다니기 힘든 구간을 다시 살펴보게 됐다.

1년쯤 전부터 나도 졸지에 교통약자가 됐다. 다치거나 한 건 아니고 아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갓 돌을 넘긴 녀석이라 어디를 데려갈라치면 유모차를 끌어야 한다. 이전같으면 성큼성큼 걸어갈 구간을 조심스럽고 느리게 가야한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니 안 보이던 것이 보였다.

먼저 이 놈의 아파트. 경비실까지 오르는데 계단, 경비실에서 엘리베이터까지 가는데 계단,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까지 가는데 또 계단이다. 엘리베이터가 층과 층 사이의 중간에 서는 것은 아마 전기요금을 아끼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고생할, 또는 아예 오르내리지 못할 교통 약자, 즉 노인, 장애인, 유아는 이 아파트에 살 권리도 없다는 이야기인가. 나야 유모차를 든 채로 계단을 내려가지만, 유모차에 아이가 실리니 그 무게가 만만치 않다. 아내는 아이가 탄 유모차를 들 엄두를 내지 못한다. 1층까지 아이는 아기띠에 맨 채, 유모차를 접어서 끌고 내려가 거기서 유모차를 편 후 아기를 띠에서 풀어 태운다. 계단만 없었으면 집 앞에서 유모차에 태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아파트를 설계한 사람의 눈에는 두 다리 멀쩡한 사람만 보였다. 아마 이 아파트가 지어진 20여년전에는 모두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설계자가 노인이 돼 계단 하나 오르내리기 힘들 때 자기가 설계한 아파트에 살아보라고 하면 좋겠다. 아, 그 당시 이 아파트 설계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꽤 부자라서 아무리 늙어도 이런 아파트에 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백화점. 백화점에 엘리베이터가 적고 에스컬레이터가 많은 꿍꿍이야 다들 짐작하는 바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한 번에 원하는 매장에 가는 대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빙빙 돌아서 여기저기 구경하게 만들기. 그리고 뭐 하나라도 더 사게 만들기. (예전 대학원 시절에 이 백화점 에스컬레이터를 두고 푸코의 판옵티콘 어쩌고 하는 말도 안되는 페이퍼를 쓴 적도 있긴 하다) 아무튼 유모차를 끌고 백화점에라도 갈라치면 그런 고역이 없다. 엘리베이터의 수가 워낙 적은데다, 대부분 격층으로 운행하고, 한참을 기다려 탑승하려고 하면 비슷한 처지의 유모차가 빼곡히 들어차있다. 두 세 번은 엘리베이터를 지나쳐야 겨우 유모차를 밀어넣을 수 있다. 유모차를 끌고는 백화점 같은 곳은 안가는게 상책이다.  

그리고 지하철. 이건 좀 다른 얘기다. 얼마전 내가 자주 이용하는 5호선 서대문 역 출구에 에스컬레이터가 생기기 시작했다. 난 이 에스컬레이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상으로 나오는 계단은 20개도 안 될 것 같다. 계단이 많은 것도 아닌데, 거기 오르내리는 쌍방향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교통약자를 위해? 그럴 리 없다. 교통약자는 어차피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힘들다. 진정 교통약자를 위해서라면 엘리베이터를 늘리는 편이 낫다. 다리 멀쩡한 사람들도 이제는 계단 20개를 오르기 싫어진걸까. 그래서 쓸만한 계단을 갈아엎고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한 걸까. 그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면 그 위를 계단처럼 걸어가기 때문이다. 출근길에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서 있는 사람을 거의 못봤다. 난 대개 에스컬레이터에서 움직이지 않는 편이지만, 사람들이 자꾸 움직이니까 나도 모르게 따라간 적도 많다. 걸어본 사람은 다들 알겠지만 에스컬레이터의 계단은 여느 계단보다 층이 심하게 져 걷기가 더 힘들다. 그래도 사람들은 서둘러 걸어간다. 그렇게 걸어서 어디로 가는걸까. 에스컬레이터 위에서도 급히 걸어가야할만큼 시간을 위태롭게 써야하는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걸까.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걷지 말자는 관변 캠페인을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난 그 캠페인을 싫어한다. 언제는 급한 사람을 위해 왼쪽을 비워두라고 했다가, 이제는 움직이지 말라고 성화다. 언제는 좌측통행 하라 그랬다가 이제는 우측통행 하란다. 예전에는 그렇게 해야 선진국이랬는데, 이제는 이렇게 해야 선진국이란다.) 

참 움직이기 힘든 나라다. 그런데 다들 빨리 가겠다고 스스로 채찍질이다. 자기 몸에 채찍을 때리며 고행하던 중세 수도사들처럼, 우리는 모두 매저키스트.

서대문 역에 새로 생긴 문제의 에스컬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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