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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같은 인간, 인간같은 컴퓨터, <가장 인간적인 인간>

저자는 철학과 컴퓨터과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인지과학과 논리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어야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딥 블루와 카스파로프의 유명한 대결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기 때문에 체스의 룰도 조금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대목을 건너 뛰더라도 독서에 무리는 없다. 난 이 책의 결론이 마음에 든다. 저자는 이제 28살. 나보다 '꽤' 어리다. 아니, 난 안드레 빌라스 보아스가 첼시 감독이 된 이후부터는 나보다 어린 사람이 어떤 성취를 이루는 것에 대해 무감해지기로 했다. 



이 사람이 브라이언 크리스찬


가장 인간적인 인간

브라이언 크리스찬 지음·최호영 옮김/책읽는수요일/434쪽/1만6000원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1912~1954)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수학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그는 2차 대전 당시 영국군에서 근무하며 독일군의 암호를 풀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튜링은 당시엔 범죄시되던 동성애자였다. 화학적 거세를 당한 그는 1년 반 동안 집에서 두문불출하다가 독을 넣은 사과를 깨물어 먹고 자살했다. 한때 인터넷에서는 애플사의 로고인 한 입 베어먹은 사과가 튜링을 기리는 뜻에서 고안됐다는 말도 떠돌았는데, 스티브 잡스는 이를 부인했다. 


튜링이 그저 2차대전의 숨은 영웅이었다거나 불운한 동성애자였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역사 다큐멘터리에서나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튜링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컴퓨터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컴퓨터는 튜링의 '보편만능기계' 구상을 따른다. 아울러 튜링은 전쟁후 '인간의 지능을 가진 기계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풀기 위해 '튜링 테스트'라는 실험을 고안했다. 실험 내용은 이렇다. 세 개의 고립된 방에 인간 2명과 컴퓨터 1대를 넣는다. 인간 중 1명이 질문자가 된다. 인간, 컴퓨터가 각각 어느 방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질문자는 텔렉스를 통해 두 방과 대화한다. 질문자가 누가 컴퓨터이고 누가 인간인지 구분해내지 못한다면, 이 컴퓨터는 '생각한다'고 간주할 수 있다. 튜링은 당시의 기술로는 이같은 컴퓨터를 구현할 수 없지만, 약 50년 후에는 튜링 테스트에서 질문자가 컴퓨터와 5분간 대화를 나눈 뒤 인간과 기계를 구분할 확률이 70%를 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휴대용 디스코 댄스플로어'를 만든 괴짜 발명가 휴 뢰브너는 튜링 테스트에 기반해 '뢰브너 상'이라는 이상한 대회를 만들었다. 이 대회에는 '인간 연합군'과 인공지능 프로그램들이 참여한다. 심사위원은 인간과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 한 쌍과 각각 5분씩, 총 10분간 대화해 어느 쪽이 인간인지 맞히고 자신의 확신도에 점수를 매긴다. 가장 많은 '인간 확신도'를 얻은 컴퓨터는 '가장 인간적인 컴퓨터'라는 타이틀을, 인간은 '가장 인간적인 인간' 타이틀을 얻는다.  2008년 열린 제18회 대회에선 튜링의 예언이 거의 실현될 뻔했다. 그 해의 '가장 인간적인 컴퓨터'인 앨봇이 12명의 심사위원 가운데 3명을 속인 것이다. 


대학에서 컴퓨터과학과 철학을 복수전공했고, 시작(詩作)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브라이언 크리스찬은 사명감에 불탔다. 기계가 인간을 다스리는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같은 영화를 떠올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컴퓨터가 튜링 테스트를 통과해 인간인 척 하는 꼴을 두고볼 수는 없었다. 기계의 발전은 빠르지만 인간의 진화는 더디다. 한번 기계가 인간을 앞지른다면 인간은 영원히 기계를 따라잡을 수 없다. 크리스찬은 제19회 뢰브너 상 대회에 참가 신청을 했다. 그리고 '인간다운 특성'을 자랑해 컴퓨터가 아직은 인간 행세를 할 수 없음을 확인시키고자 했다. 



컨셉은 알겠지만 그리 잘 찍은 사진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무엇이 '인간다움'인가. 대회 조직위원장은 "그냥 인간으로 있으면 됩니다. 그냥 선생님 자신이 되도록 하세요"라는 조언을 건넸다. 하지만 '나 자신이 되라'는 말은 모호하다. 내가 누구인데 나 자신이 되는가. 그건 선불교의 화두보다 풀기 어려운 일이다. 크리스찬은 대회를 준비하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먼저 인간에겐 개성이 있다. 그 개성이 좋아 보이든 나빠 보이든, 그것은 그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다. 크리스찬은 텔레비전 드라마 <오피스>를 예로 든다. 14편으로 구성돼 인기를 끈 영국 드라마 <오피스>는 미국에서 130편의 동명 작품으로 리메이크했다. 그런데 영국에선 그토록 생기발랄하던 작품이 미국에선 무언가 빠진 듯 보였다. 영국판에는 있지만 미국판에 없는 것은 '작가'였다. 영국판은 2명의 작가가 전체 시리즈를 만들었지만, 미국판은 서로 다른 사람이 집필하고 연출했다. 미국판 130개의 에피소드를 통틀어 변하지 않는 것은 배우밖에 없었다. 작가의 비전이 빠진 작품은 예술이 아니라 상품에 가깝다. 


개성을 잃고 표준화된다는 것은 미국 드라마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자제품이나 통신사 서비스센터에 전화로 문의하는 경우, 상대방을 설득시켜 물건을 파는 영업사원의 경우, 대형 결혼정보 서비스 기업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각기 다른 정신과 육체를 갖고 태어나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성장한 인간들이 몇 가지의 매뉴얼로 표준화돼 정리된다. 고객이 A라고 물으면 직원은 B라고 반응하도록 교육받는다. 지하철 압구정역 벽을 가득 채운 성형외과 광고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 수 있다. 모든 사람의 얼굴이 코는 오똑하게, 입술은 도톰하게, 눈은 크게 '개량'된다. 기계가 인간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 인간은 기계를 닮으려 하고 있다. 


개성을 강조하고 자율성을 주면 능률도 오른다. 기업인 티모시 페리스는 외부 대리인에게 고객 서비스 분야의 하청을 맡겼는데, 대리인은 환불을 해줘야 하는지, 고객의 소리에 어떻게 응해야 하는지 일일이 페리스에게 물어왔다. 페리스는 매뉴얼을 써주는 대신 "저에게 자꾸 승인을 요청하지 마세요. 그냥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세요"라는 e메일을 보냈다. 고객 서비스는 순식간에 개선됐다. 페리스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부여하고 그들을 신뢰하는 것을 보여주자, 마치 그들의 지능지수가 순식간에 두 배로 껑충 뛴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체스의 대가들에게는 '책'이 있다고 한다. 이는 지금까지 대가들이 벌인 유명한 게임의 진행상황을 정리한 데이터베이스를 말한다. 마스터가 되고자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외움으로써 게임을 이기고자 한다. 그들에게는 한 수의 '의미'보다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다. 이래서는 세계의 그 어느 마스터보다 더 많은 '책'을 보유할 수 있는 기계를 이길 수 없다. "체스는 책에서 빠져 나옴과 동시에 시작되고 책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끝난다. 체스는 오직 중간에서만 전기처럼 불꽃을 튀긴다. "


'책'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는 체스 선수 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한 대학생은 정치인 사라 페일린의 야후 e메일 암호를 순식간에 알아내 해킹한 혐의로 구속됐다. 암호를 알아내는 건 간단했다. 야후가 이용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물어보는 건 '가장 친한 친구', '가장 좋아하는 동물' 등 몇 가지 정해진 질문이었고, 이 대학생은 인터넷에서 순식간에 이런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인터넷 사이트들은 가입 신청을 받으면서 취향을 직접 써넣게 하는 대신 몇 가지 제시된 것 중 하나를 고르게 한다. 이렇게 규격화된 취향이 기업의 상업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크리스찬은 권한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나 하고 싶은 일이 상대방의 '메뉴' 밖에 있다면 '정해진 체계'를 깨부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책임자 나와!"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적인 인간'이 되는데 필요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한다. "인간의 실존은 인간의 본질에 선행한다"는 실존주의의 주장은 인간이 커피메이커처럼 커피를 만들기 위해 태어나거나, 망치처럼 못을 박기 위해 태어나거나, 자동차처럼 달리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인생에는 정해진 목표가 없다. 그러므로 '자유의 불안'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인생이다. 


'인간다움'을 가장 쉽게 뽐낼 수 있는 영역은 바로 인간 사이의 '대화'다. 텔레마케터나 서비스센터의 직원같이 주어진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말은 대화가 아니다. 원하는 말을 얻어낼 때까지 다그치는 검사나 언론인의 말은 취조다. 대화는 정교한 기술이다. 언제 상대방의 말에 끼어들어야 할지, 언제 상대가 내 말에 끼어드는걸 허용할지, 주제를 이탈해도 좋은지, 농담을 섞어도 좋은지를 두고 미묘한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 크리스찬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가장 안정적인 직업은 인터뷰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훌륭한 질문을 던지고, 상대의 감정을 배려하고, 상황에 맞는 태도를 취하는 건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밑줄 그을 만한 문장이 몇 가지 있다. IBM의 컴퓨터 '딥 블루'와 대결을 벌인 체스 세계 챔피언 개리 카스파로프는 "뭔가 반복적이고 쉬워졌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순간은 내 에너지를 쏟아부을 새 목표를 빨리 찾아야 할 때이다"라고 말했다.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젊은 여자의 볼을 장미에 비유한 최초의 사람은 분명히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반복한 첫 번째 사람은 아마도 멍청이였을 것이다"라고 했다. 크리스찬은 인간이라면 지금 당장 메뉴얼을 버리라고 권한다. 


기계가 인간의 영역을 잠식한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인간에겐 여전히 가능성이 있다. 스팸 메일이 메일함을 가득 채우는 사태가 일어나자, 인간은 인간다운 제목을 써 스팸 메일 취급받지 않을 수 있도록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형식적으로 '친구야 오랜만이다' 하는 제목을 썼다가는 바로 스펨 메일함으로 옮겨지기에, '네가 지난 주 북한산에 오르면서 건넸던 그 제안은 말이야…'라고 시작하는 편이 좋다. 인간은 그동안 논리적 추론을 관장하는 두뇌 좌반구의 힘을 중시했으나, 이 영역에서 컴퓨터가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걸 확인한 이상 이제 우반구의 힘을 깨달을 때다. 우리의 육체, 감정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크리스찬은 2009년 뢰브너 상 대회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간'으로 꼽혔다. 크리스찬은 상이 무의미하진 않지만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는 상을 받은 뒤 대회장 바깥으로 나와 상쾌한 바다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지역 주민이 운영하는 작은 신발가게에 들어가 여자 친구에게 줄 선물을 샀다. 영국 상인은 크리스찬의 미국식 액센트를 알아챘고, 크리스찬은 자신이 시애틀에서 왔다고 답했다. 상인과 크리스찬은 시애틀의 그런지 록에 대해 잠시 이야기했다. 그리고 서로의 음악 취향을 탐색한 뒤 자기가 알고 있는 다른 밴드를 들어보라고 권했다. 


물론 인터넷 음악 사이트도 내 구매 취향을 분석한 뒤, 새로 나온 음악을 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닷가 상점에서 완전한 타인과 즉흥적으로 이뤄진 음악 잡담만큼 흥미롭진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