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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이들의 거대한 세계, '우리들'


영화 '우리들'에 대해. 간혹 영화를 본 뒤 감독을 만나면 절로 웃음이 나올 떄가 있다. 감독의 모습이 배우가 영화 속에서 하고 나온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윤가은 감독은 선 역의 최수인 배우를 "예뻐서 뽑았다"고 했는데, 최수인 배우가 윤 감독하고 비슷한 느낌이라는 걸 알았을까. 


영화 <우리들> 속 아빠는 퉁명스럽게 말한다. “애들이 일 있을 게 뭐가 있어? 그냥 학교 가고 공부하고 친구들하고 놀고 그럼 되는 거지.”

그러나 아이들한테는 일이 많다. 말 한마디, 시선 한 번에 그들 나름의 세계가 섰다가 또 무너진다. 삶의 경험을 쌓은 어른들은 위선, 위악, 무심의 기교를 적절히 부리며 관계를 조절하지만, 아이들끼리 맺는 관계는 그 자체로 투명해 적나라하다.

16일 개봉하는 <우리들>은 초등 4학년 소녀들 사이의 폭풍 같은 감정과 관계를 다룬다. 선(최수인)은 반 친구들이 피구하면서 편을 가를 때 가장 늦게 선택되는 아이다. 홀로 지내는 데 익숙한 선은 갓 전학온 지아(설혜인)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다. 선과 지아는 학교와 집을 함께 오가며 별스럽지 않은, 그러나 둘에게는 커다란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공부 잘하고 인기 많은 보라(이서연)가 지아에게 접근하면서, 선은 다시 혼자가 된다. 선은 대책을 세운다.

선의 아버지는 공장에서, 어머니는 김밥집에서 일한다. 선은 영국에서 살다왔다는 지아, 공부를 잘하는 보라와는 다른 계급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들>의 미덕은 소녀들 사이의 관계 맺기를 흔한 계급 갈등으로 치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실 ‘따돌림’에는 이유가 없다. “못살아서” “공부를 못해서” “못생겨서”는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만들어낸 구실일 뿐이다. <우리들>은 미묘하고 모호해서 파악하기 쉽지 않은 따돌림의 지점을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영화 <우리들>의 장면들.

<우리들>로 장편 데뷔한 윤가은 감독(34)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과정 재학 시절 <손님> <콩나물> 등의 단편을 선보였다. 단편들도 모두 어린이가 주인공이다. 윤 감독의 작품 세계 속 어린이는 한국의 영화, 드라마가 흔히 그리는 ‘잃어버린 순수의 표상’이 아니다. 오히려 성인의 윤리나 위선으로 통제되지 않은 약육강식, 자연선택의 세계를 구축하곤 한다.


윤 감독은 어린이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 독특한 연출 방식을 택했다. 배우들을 캐스팅하자마자 연기 학원을 그만두게 한 뒤 제작진과의 워크숍을 시작했다. 시나리오를 보여주기 전 영화 속 상황을 들려주고 배우들이 스스로 즉흥극을 만들도록 했다. 배역의 성격이나 상황은 제시하되, 촬영을 앞두고 ‘쪽대본’을 제공해 배우들이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대사를 지어내 고칠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어 선이 지아에게 줬던 팔찌를 되돌려받는 장면도 배우들의 반응에 따라 고쳐졌다. 원안은 선이 지아의 팔찌를 강제로 빼앗는 것이었으나, 배우들이 상황을 불편해하고 심지어 울음까지 터뜨리자 다른 방식으로 순화했다.

최근 만난 윤 감독에게 “왜 어린이만 주인공으로 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왜 어른만 주인공으로 찍어야 하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아이들도 삶의 주체인데요. 오히려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는 흔하지 않아서 귀하죠. 전 어제 일보다 20년 전 일이 더 생생히 생각납니다. 어쩌면 현재의 일은 어린 시절 겪은 일들의 반복과 변주에 불과할지 몰라요.”

최근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곡성> <부산행>의 아역 배우들이 주목받는 현상에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윤 감독은 “<5학년 3반 청개구리들> <키드캅> 같은 옛날 영화를 보면, 그때에도 아역 배우들은 훌륭했다”며 “다만 요즘엔 글을 쓰는 작가, 감독이 아이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주체로서 인식하기 시작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와 CJ E&M의 산학협력 과정을 통해 제작됐다. 당시 학생들의 제작 과정을 총괄한 이는 이창동 감독이었다. <우리들>의 애초 트리트먼트는 미스터리 장르물에 가까웠다. 이창동 감독은 이 트리트먼트를 통과시켰지만, 정작 면담을 위해 찾아온 윤가은 감독에게 말했다. “내가 보기엔 이거 가짜 같아. 진짜를 다시 써봐.” 스승의 한마디에 정신이 든 윤 감독은 작품의 방향을 완전히 틀었고, 그 결과 오묘하고 섬세하고 사실적인 오늘날의 <우리들>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