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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국적은 무엇인가,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


일본 훗카이도 샤쿠베쓰 탄광 입구에서 찍은 징용자 단체 사진(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소장)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

서경식 지음·형진의 옮김/반비/272쪽/1만4000원


지난해 말 개봉한 영화 <마이웨이>는 거액의 제작비를 들여 한국, 일본, 중국의 스타 배우를 캐스팅하고 유명 감독이 연출했지만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 강제 징집된 조선인 마라토너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의 흥행 실패 요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캐릭터의 갈등이나 생동감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전세계의 전장을 누비면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변한 없는 휴머니스트의 면모를 보인다. 국가, 이념 따위가 아니라 ‘사람이 우선’이라는 휴머니즘에 대해 시비걸 관객은 많지 않겠지만, 휴머니즘 하나로 관객을 설득하기엔 한·일 양국의 역사가 너무 복잡했던 것이다.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은 재일조선인 2세로 인권, 역사, 디아스포라의 경험 등에 대해 활발한 저작 활동을 벌이고 있는 서경식씨의 신작이다. 도쿄게이자이대학 교수인 그가 ‘인권과 마이너리티’라는 수업에서 20년간 강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재일조선인은 누구인가’를 알기 쉽게 전하려 쓴 책이다.


일본 독자를 상정한 내용을 왜 한국 독자가 읽어야 할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재일조선인’은 크게 보면 한민족에 속하므로, ‘우리는 그들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한국 독자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잘 알고 있는가. 혹시 일본의 유명 인사 중 ‘알고 보니 한국계’라는 소문이 도는 이가 있다거나,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에 재일교포 선수들이 건너와 활약했다는 내용 정도가 지식의 전부는 아닐까. 그들은 왜 일본에 살며, 일본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까.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요즘엔 한국 언론에서도 흔히 일본에서 통용되는 ‘자이니치’(在日)로 재일조선인을 부른다. 그러나 저자는 이 호칭부터 거부한다. ‘재일조선인’에서 ‘조선인’이 빠진 배경에는 ‘조선’이라는 말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녹아있을 것이라는 추정 때문이다. 식민지 시대 일본인들은 ‘내선일체’를 주창하면서 일본인과 식민지 조선인이 하나라고 말해왔지만, 실상 조선인은 이등 국민 취급을 받았다. 일본인은 조선에 마음대로 와도, 조선인은 일본에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 조선인 학생은 같은 학급에서 공부하는 일본인 학생에 비해 박대받았고, 조선인 노동자는 같은 일을 하는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았다. ‘조선이라는 민족 호칭’은 이후 그대로 차별어가 됐기에, 해방 이후에도 일본인들 사이에는 조선이라는 ‘어두운 이미지’의 말을 쓰기 불편해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저자 역시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일본인에게 말할 때 “높은 곳에서 ‘에잇!’ 하고 뛰어내릴 때와 같은 용기”를 내야 했다고 돌이킨다.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에는 또 하나의 난점이 개입된다. 바로 남북 분단이라는 요소다. 식민지 시대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들은 한국 국적이나 북한 국적을 받은 적이 없기에, 재일한국인이나 재일북한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래서 저자는 일본에 병합된 1910년 이전까지의 왕조 이름이자 고대부터 중국이 한반도에 세워진 국가를 부르는 이름이었던 ‘조선’, ‘조선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르다는 입장을 보인다. 



일본의 풍자잡이 '도쿄 퍽'(Tokyo Puck)에 게재된 만화. 일본 남자와 한국 여성이 혼인신고를 하는 모습으로 한일 합방을 은유했다. 관공서 접수대에는 백인 여성이 있는데, 이는 한일 합방을 서구에 승인받고자 하는 심리를 표현한 듯 보인다. 



물론 호칭이란 매우 어렵고 헷갈리는 문제다. 어떻게 불리느냐에 따라 정체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복잡한 호칭의 문제는 또다른 사유의 가능성을 불러낸다. “어떤 의문도 없이 국가에 몸을 맡기는 삶보다는, 타자의 고통을 상상하고 국가라는 조직이 일으킨 잘못에 마냥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기회를 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서경식씨의 어머니였다. 가난을 피해 여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온 어머니는 온갖 일을 닥치는대로 했고, 교육은 전혀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인에 대한 모멸적인 언행을 당한 뒤 집에 돌아와 풀이 죽어있는 어린 서경식에게 “조선은 나쁜 게 아니야”라고 속삭여준 사람이기도 했다.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을 교육받을 기회는 없었지만, 오히려 교육받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은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애국주의 사고 방식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정부가 명령하는 것, 강요하는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를 스스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경식씨의 가족은 일본에서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타자’였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그의 두 형 서승·서준식씨는 서울에서 유학하다가 간첩 혐의로 체포돼 장기간 복역했다. 어머니는 한국에 왕래하며 옥바라지를 하면서도 “신념에 충실히 살라”고 아들들을 격려했다. 한국의 교도관은 “역시 재일조선인은 애국심이 결여된 것 같다”고 비웃었지만,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박대받았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들이 국가라는 인위적인 울타리를 뛰어넘은 사고, 행동을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현재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재일조선인은 60만명 가량이다. 식민지로부터 자원과 인력을 빨아들여 본국의 부를 늘리는 것은 대부분 제국주의 국가의 운영 방식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로 생활 기반이 파괴된 조선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떠났다. 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내 부족해진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도 있었다. 식민지 시절엔 이들에게도 일본 국적이 부여됐으나, 해방 이후엔 졸지에 무국적자가 됐다. 이는 독일에 병합된 오스트리아인,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인들이 독립 이후 독일 혹은 오스트리아, 프랑스 혹은 알제리 국적 중 선택할 기회를 받은 것과는 대조되는 처사였다. 이미 생활 기반이 사라진데다가 전쟁이 난 조국에도 돌아갈 수 없게 된 이들은 일본 국적을 상실한 채 일본에 갇혀버린 신세가 됐다. 


승전국 미국은 패전국 일본에 민주주의를 ‘이식’했다. 연합국은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의 이름을 따 ‘맥아더 초안’이라 불리는 새 헌법을 일본에 제시했는데, 영어 헌법을 일어 헌법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영문 헌법에는 “누가 국민인지는 법률로 정해진다. 사람들(people)의 기본적 인권은 보호된다”고 적혀있었는데, 일문 헌법에선 ‘people’을 ‘국민’으로 번역했다. 결국 일본 헌법은 일본 국민의 인권만을 보호한다는 것으로 좁게 해석됐다. 한때 조선, 대만 등 식민지 주민들에게 싫다는 일본 국적을 강제로 부여해 자신들의 신민으로 삼은 일본이, 이제는 그 국적을 강제로 빼앗아 인권을 보장하는 울타리 밖으로 내쳤다. 하루 아침에 무국적자가 된 재일조선인들은 취직, 주거, 여행 등 생활 모든 면에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피선거권이 없어 정치인이 될 수 없고, 국가 공무원, 경찰관, 공립학교 교사가 될 수도 없다. 100여개의 조선 학교는 정식 학교로 인정받지 못해 학비 지원, 대입 자격 등에서 제한을 받고 있다. 


그래서 모두가 국적을 얻어 국가의 품에 안기자는 말일까. 저자는 이를 뛰어넘어 개인의 정체성 문제를 국가에 의탁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그는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인용한다. “1914년(1차 대전 개전의 해) 이전에는 대지는 모든 인간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고, 원하는 만큼 머무를 수 있었다. 허가도 없었고 비자 같은 것도 없었다.…대전 후에야 비로소 국가주의에 의한 세계 혼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 세계의 이 정신적 유행병이 가져온 첫 번째로 눈에 보이는 현상은 외국인 혐오였다.”


국가는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안정감의 이면엔 구속감이 붙어있다. 국가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을 때, 예를 들어 침략 전쟁을 벌이려 할 때, 해당 국가의 국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민은 국가와 ‘운명 공동체’이므로 이의 없이 국가의 결정을 지지해야 하는가. 국가가 약자를 탄압하고 강자를 보호할 때, 그리고 그것을 ‘법’이라고 부를 때, ‘법에서 정했으니 어쩔 수 없다’며 돌아서야 하는가.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은 일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책이지만, 한국의 독자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다수’인 일본인 대신 한국인, ‘소수’인 재일조선인 대신 이주노동자를 대입해 생각하면 어떨까.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없어지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상상력도 없어지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국가’의 문제, 과거사 정리의 문제는 대선에 나서는 정치인들을 바라보는 기준으로 삼을만하다. 유력 대선 후보들에게 ‘국가관’을 밝히라는 여론의 요구가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국가관’이 아니라 ‘인간관’일 수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는 5·16을 ‘과거사’라고 규정한 뒤, 이를 “쿠데타냐 혁명이냐 싸우는 것 자체가 정치인이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는 일본 정치인들의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앞을 향해 가자”는 논리와 유사하다. 서경석씨는 일본 정치인들의 ‘미래 지향’이란 곧 ‘사고 정지’와 같다고 규정한다. “우리가 오늘날처럼 살고 있는 것은, 어떤 사회적 관계나 역사의 결과인가 하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과거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다시 영화 <마이웨이>를 떠올려보자. 따져보면 <마이웨이>는 2차대전, 식민지의 문제를 국가가 아닌 개인의 차원에서 풀어보려는 대중영화의 시도였다. “천황을 위해 죽으라”라는 국가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조선인과 일본인이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우정을 나누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올바르게 보이지만 또한 성급한 시도였다.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한가로운 노르망디 해변에서 민족, 국적이 다른 두 병사가 나란히 달리기를 하는 것만으로 과거사의 문제가 덮이진 않기 때문이다. 미래로 나아가려는 사람일수록 과거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역사의 문제는 감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