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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영웅들과 벌이는 연애 대결, <미드나잇 인 파리>

쉬는 날 운좋게도 <미드나잇 인 파리> 언론 시사회가 있었다. 개봉 하면 보러 가게될 확률이 90% 이상인 이 영화를 미리 볼 기회가 생긴 것이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았다. 



<미드나잇 인 파리> 포스터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헐리우드 각본가 길이 약혼녀 이네즈, 그녀의 부모와 함께 파리 여행을 온다. 그런데 길과 이네즈 집안은 뭔가 좀 안맞다. 길은 비록 몸은 할리우드에 있지만 마음은 파리에 머물고 싶어한다. 조금씩 소설을 밀고 나가지만 자신의 재능에 확신은 없어 보인다. 비맞으면서 산책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는 70% 정도 현실에 발목 잡혀 있으나 여전히 보헤미안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반면 이네즈 가족은 현실적이다. 조금 경멸적인 의미에서의 전형적 미국인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은 미국 바깥에서 살 생각이 전혀 없다. 파리는 그저 값비싼 골동품 가구를 구하는 장소 정도의 의미가 있다. 비가 오면 냉큼 차를 집어타고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나이(76)를 고려하면 멀쩡해 보이는 우디 앨런


어느날 살짝 술에 취해 호텔로 돌아가던 길은 우연히 고풍스러운 자동차에 올라탄다. 그리고 1920년대 파리에 발을 디딘다. 바로 길의 예술적 영웅들이 있는 곳이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T.S. 엘리엇, 피카소, 달리, 브뉴엘, 만 레이를 만나 감격하고 대화하고 영감을 얻고 영감을 준다. 당대의 비평가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작품을 보여준 뒤 용기를 얻기도 한다. 그들과 헤어져 돌아가 아침이 되면 다시 2010년대, 자정이 되면 1920년대. 길은 낮과 밤을 번갈아가며 현실과 이상을 체험한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우디 앨런의 영화다. 길은 사랑에 빠진다. 피카소와 헤밍웨이가 함께 좋아했던 한 여인. 그러나 현실에 70% 발목 잡힌 길은 약혼녀를 과감히 떠날 수 없다. 


홍상수의 영화에 나오는 모든 남우가 '홍상수풍 남자'가 되듯, 우디 앨런 영화에 나오는 모든 남우는 '우디 앨런풍 남자'가 된다. 앨런 본인이 연기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앨런의 영화에 별로 어울리는 것 같지 않던 오웬 윌슨도 첫 대사부터 곧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우디 앨런풍 남자' 연기를 한다. 자신이 열광하는 대상에 대해 수다스럽고 세상에 대해 냉소적이지만 면전에 대고 나쁜 말을 할 용기는 없는, 그리고 가끔 말을 더듬기도 하는 그런 남자. 


길은 헤밍웨이, 피카소와 사랑의 대상을 두고 다투는데, 근소한 차로 이길 가능성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연애의 대가'인 앨런이 자신의 예술적 영웅들과 벌이는, 겸손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대결같기도 하다. 헤밍웨이처럼 쓰거나 피카소처럼 그리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여자를 빼앗을 기회를 노릴 수는 있다는 이야기. 


<미드나잇 인 파리>가 연애에 대한 앨런의 자신감 말고 다른 것을 더 많이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몇 가지 잔재미가 있긴 하다. 우리가 상상하는 1920년대 파리의 예술가 영웅들이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과 지나치게 흡사하게 등장해 웃음을 준다. 헤밍웨이는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지한 눈빛으로 전장에서의 경험을 읊어대더니, 술만 마시면 복싱을 하자고 주사를 부린다. 피츠제럴드 부부는 모두가 상상하듯 철없는 향락에 빠져 있다. 카메오처럼 등장하는 애드리언 브로디의 살바도르 달리 역시 키득대고 웃을만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길이 자신을 "미래에서 왔다"고 소개하자, '초현실주의자'인 달리, 만 레이, 브뉴엘이 전혀 놀라지 않고 받아들이는 유머도 기억에 남는다. 






스콧과 젤다 피츠제럴드 부부, 피카소, 달리, 헤밍웨이(위로부터)


그러나 그 정도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시대를 부정하고 앞 시대를 사랑한다"는 전언은, 우리가 오랫동안 생각하기엔 좀 약한 화두다. 앨런의 영화는 'bittersweet'이 비율이 잘 맞았을 때가 좋은데, <미드나잇 인 파리>는 'sweet'의 비율이 좀 높다. 그의 2000년대 영화를 돌아보면 <매치 포인트>는 작심한 듯 'bitter'가 강했고, 그래서 좋았고, <환상의 그대>는 두 맛이 고루 있었다. 신작 <투 로마 위드 러브>는 앨런이 직접 출연함에도 평이 시큰둥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래도 한국에 들어오면 나는 찾아본다. 



그래도 마리온 코티아르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라는 사실에는 우디 앨런과 나를 비롯해 전세계의 안목 있는 인간들이 모두 동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