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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길, 소설의 길, <7년의 밤>


원론적인 질문. '영화같은 소설'이라는 말은 소설에 대한 호평일까. 올해 나온 가장 뜨거운 한국 소설 <7년의 밤>을 읽고 떠오른 의문이다.

내 손에 든 책만 해도 20쇄다. 15개 영화사들이 경쟁한 끝에 1억원의 계약금과 5%의 러닝 개런티로 판권이 팔렸다는 소식도 있었다. 휴가를 맞아 읽어보니 그럴만하다. 어떻게든 다음 페이지, 다음 페이지로, 결국 결말로 손가락을 이끌어가는 힘이 있고, 취재가 꼼꼼하다.

무엇보다 별다른 각색이 필요할까 의문이 들 정도로 영화화하기 좋은 영상이 그려진다. 어떤 성급한 독자들은 등장인물 최현수와 오영제 역에 이런저런 배우들을 가상 캐스팅해보면서 즐기고 있다고도 하고.

그러나 그게 좋은 걸까. 영화로 쉽게 번역되는 소설은 좋은 소설일까. 이미 '영화의 시대'를 거쳐온 독자들이 영화적인 서사와 묘사에 익숙하다보니, 소설조차 영화의 방법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는걸까. 소설이 한 세대의 지식과 이념과 도덕의 총화였던 시대는 이미 지나간 바, 그래서 소설의 독자층이 차츰 엷어지고 있는 현상을 되돌리기도 힘든 바, 그럴수록 소설은 필요도 없는데 공을 들여 만들어진 명품처럼 고급화 전략을 써야하는 것 아닐까. 물론 <7년의 밤>이 그런 어려운 전략을 택하는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이 영화와 소설의 중간길이 아니라 소설만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특히 차분하게 쌓아올린 갈등이 격렬하게 폭발해야할 소설의 종반부는 두 남자의 흔한 액션 장면처럼 연출돼 400여쪽을 읽어온 어느 독자의 김을 뺐으며, '다 끝나면 오는 경찰'은 이제 영화에서조차 함부로 쓰지 못할 클리셰가 아닌가.

무엇보다 <7년의 밤>에 적응이 힘들었던 부분은, 각자 50부작 드라마 하나씩은 꾸며낼법한 등장인물들의 사연이었다. 물론 여기서 최현수=선인, 오영제=악인의 등식을 요구하는건 아니지만, 등장인물들의 지나치게 극적이고 굴곡많고 때로 통속적인 사연은 독서에 뜻하지 않은 피로감을 안겼다. 그 피로감은 새로운 깨달음, 아름다움, 윤리의 차원을 넘겨본데서 온 것이 아니라, 단순한 제자리걸음에 따른 것이었다.

얼마전 읽은 지젝의 책에는 소설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글이 인용돼 있다. "무대 위의 인물은 패션쇼의 의상처럼 평면적이어야 한다....심리적 리얼리즘은 혐오스러운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개인적 성격의 심층에 넋을 잃고 인성의 '호화로움' 속으로 대피함으로써 불쾌한 현실을 피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7년의 밤>의 최현수와 그외 등장인물들은 지젝의 표현대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 무의미한 음주와 폭행과 감금과 살인의 난장을 '인간적'으로 그리는 방식이 마땅치 않았다. 어쩌면 느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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