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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쏭달쏭 표절논란



기사를 쓰면서 얄팍하게나마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법서지만, 꼼꼼하게 읽으면 어렵지 않다. 




외국에서 유학, 교수 생활을 마치고 지난해 고려대 심리학과에 부임한 박선웅 교수는 한국의 표절 시비가 당황스럽다고 했다. 실험 설계, 데이터 해석에 관여한 지도교수를 논문 저자 중 하나로 올리는 일, 하나의 실험을 여러 개 논문으로 발표하는 일, 학위 논문을 학술지에 다시 발표하는 일 등은 해외 학계에서 허용되는데 한국에선 종종 ‘표절’로 몰리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학문 윤리, 표절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지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2006년 김병준 교육부총리 지명자가 표절 시비로 낙마한 뒤, 학위가 있는 공직자들은 혹독한 논문 검증을 거쳐야 했다. 문대성 의원은 박사학위 논문 표절 시비가 붙어 한때 새누리당을 떠나야 했고, 자기계발 강사 김미경, 방송인 김미화씨 등 정치권 바깥의 인사들도 검증에 시달렸다. 최근에는 홍용표 통일부 장관 후보자, 유일호 국토부 장관 후보자가 논문 표절 의혹을 받았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신간 <표절론>(현암사)에서 표절에 대한 역사적·법적 이해를 시도한다. 학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제기하는 무분별한 표절 논란에 일침을 가하는 동시에 학계 내부의 성찰도 강조한다.


최근 표절 논란이 부쩍 늘어난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학벌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학위 논문이 많이 나오고 있다. 또 표절 검색 소프트웨어가 발달해 표절 의혹물과 피해물을 쉽게 대조할 수 있다. 독일, 일본 등 학문 선진국에서도 표절 문제로 학자, 정치인이 수모를 당하는 일이 잦다는 점에서 표절 논란은 “선진사회에 진입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한국의 표절 논란이 학문적 판단이 아니라 진영 논리, 여론 재판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이다. 특히 학자, 창작자의 경우 표절 논란을 겪으면 실제 표절 여부와 상관 없이 평생 낙인을 찍힌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하지만 합리적인 표절 판정 기준을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형두 교수는 “표절은 고깃간에서 고기 무게를 재듯이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음악·미술·문학 작품은 물론, 학문도 분야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음악계에선 ‘8소절이 같으면 표절’이라는 상식이 있지만, 이는 어불성설이다. 음악의 핵심 모티프라면 2소절만 베껴도 표절(예를 들어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이고, 핵심이 아니라면 8소절을 넘겨도 표절이라 할 수 없다. 


논문도 마찬가지다. 학계에서 통용되는 ‘일반지식’을 옮긴다고 해서 표절은 아니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지점에서 결정된다”는 문장은 어떤 경제학 책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표절 소프트웨어는 일반지식을 구분할 능력이 없다. 무엇이 일반지식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해당 학계의 전문가들이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런 이유로 외국에서도 논문 표절 판정에 1~2년이 걸린다.  


‘자기 표절’도 최근 표절 논란에서 종종 문제된다. 자기 논문의 일부를 바꿔 또 다른 학술지에 중복 게재함으로써 실적을 늘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선행논문과 후행논문에 같은 표현이 얼마나 있는지는 문제가 아니다. 남 교수는 “선행논문과 후행논문이 10%만 달라도, 그렇게 다른 부분이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면 표절로 볼 수 없다”고 설명한다. 법원에서도 박사학위 논문을 일반 학술지에 다시 게재하는 것은 ‘학문의 심화’ 과정으로 보는 추세다. 


지금까지 표절에 엄격하지 못했던 학계 관행도 문제다. 대표적인 것이 다른 이의 글을 표현만 바꿔 다시 쓰는 간접인용 혹은 글로 표현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가져다 쓰는 아이디어 도용이다. 이는 법적으로 ‘저작권침해’는 아닐지언정, 윤리적으로는 표절이다. 각 대학에서 표절 판정에 2~5년의 시효제도를 두고, 이 기간이 지나면 표절 의혹을 제기할 수 없게 한 점도 문제다. 남 교수는 “표절 판정에 검증시효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표절 판정은 법적으로 까다로운데다가 일반의 상식과도 다른 부분이 있어 법원에서도 세심하게 접근하는 분야다. 수도권 지역에 근무하는 한 부장판사는 “요즘은 대놓고 베끼기보다는 아이디어만 가져오는 경우가 잦다”며 “이를 문화적 흐름으로 볼지, 표절로 볼지 판단에 신중함을 기해야 한다”고 말했다.